보통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로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하는 표현이 있다.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이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결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스님들을 이렇게 부른다. 이런 삶을 사는 수행자를 ‘할 일 없는 도인’이라고 하니, ‘운수도인(雲水道人)’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한가로운 삶 속에서 상큼하고 맑은 바람처럼 모든 사람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줄 수 있는 분이므로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이런 본디 모습을 망각하고 분수에 넘치게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좇아 세상살이에 연연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을 ‘명리납자(名利衲子)’라고 한다. <선가귀감> 60장에서 말한다.
名利衲子 不如草衣野人.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좇는 수행자는 허름한 옷을 입고 사는 산골사람만도 못하느니라.
수행자로 풀이한 ‘납자(衲子)’는 낡은 누더기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다. ‘납(衲)’은 낡은 천을 더덕더덕 기워서 만든 누더기 옷을 말한다. 세상에서 쓰다버린 낡은 천 쪼가리를 여러 개 이어 옷을 만들다 보니 그 쪼가리 천의 숫자가 많아졌으므로 ‘백납의(百衲衣)’라 말하기도 하고, 천 조각이 많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이 어울려 오색(五色)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됨으로서 ‘오납의(五衲衣)’ 또는 오색의(五色衣)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옷차림에서도 스님네의 진솔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지푸라기처럼 던져버린 수행자에게 옷이란 세상 사람처럼 신분과 부귀를 드러내어 뽐내는 허영의 도구가 아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산속에서 고행하며 검박한 삶으로 오로지 수행에 힘쓰며 살아가는 스님네를 세상에서 존경하는 의미로 ‘납자’라고 부른다.
누더기 옷 한 벌만 걸치고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결처럼 사방으로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본 모습을 망각하고 분수에 넘치게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좇아 사치스럽게 사는 수행자를 ‘명리납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원효 스님은 “수행자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 쓰는 것이요 도인이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고슴도치가 빠져나오지 못할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行者羅網은 狗被象皮요 道人戀懷는 蝟入鼠宮]”이라고 말하였다. 공부길을 벗어난 명리납자는 허름한 옷을 입고 사는 산골사람만도 못하기에 서산 스님은 말한다.
唾金輪入雪山 千世尊 不易之軌則 末世羊質虎皮之輩 不識廉耻 望風隨勢 陰媚取寵 噫 其懲也夫.
왕이라는 높은 자리도 버리고 히말라야 설산에 공부하러 들어가는 일은 모든 부처님이 본받았던 바뀌지 않을 수행자가 따라야 할 영원한 규범이다. 그런데 말세에 양질호피(羊質虎皮)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른 무리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세상에서 바람몰이 세력을 좇아 아첨하고 잘 보이려고만 애를 쓰니 아! 잘못된 그 모습을 뉘우칠지어다.
‘타금륜입설산(唾金輪入雪山)’은 ‘황금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에 침을 뱉고 설산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금륜(金輪)’은 황금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인데 온 천하를 통일한 전륜성왕만이 타고 다닌다. 이 수레에 침을 뱉었다[唾]는 것은 천하를 호령하는 전륜성왕의 높은 자리도 도(道)를 닦기 위해서 어떤 미련도 없이 버렸다는 것이니, 이는 왕의 부귀영화보다 부처님의 세상이 더 좋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설산(雪山)’은 눈 덮인 히말라야 산이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도를 닦기 위하여 수행자들이 이 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이 그리하셨다고 한다. ‘천세존(千世尊)’은 ‘천 명의 세존’이란 뜻이지만 사실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 이런 모습을 본받지 않으므로 부처님이 안 계시고 부처님의 법도 세간에서 사라져 참 불법을 배우기 어려운 ‘말세(末世)’에 이르러서는 ‘양질호피(羊質虎皮)’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무리들이 나타난다.
양질호피(羊質虎皮)를 풀이하면 ‘양의 성질과 호랑이 가죽’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 한(漢)대의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에 나오는 말이다. 순한 양이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호랑이 흉내를 냈지만, 풀을 보면 풀을 뜯어먹었고 승냥이를 보면 승냥이가 무서워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양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 채 호랑의 가죽만 뒤집어쓰는 것은 진짜 호랑이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출가한 사람의 마음씀씀이가 바뀌지 않으면 겉으로 제아무리 수행자처럼 잘 꾸며도 사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 마음의 본바탕이 맑고 깨끗하지 못한데 부처님의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거룩한 수행자처럼 살아간들 거짓된 위선자일 뿐이다.
절집에서 말하는 수행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맑고 깨끗하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삶 자체는 맑고 깨끗하여 주어진 출가자의 삶에 만족하고 세상의 헛된 욕망을 추호도 끄달림이 없이 정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끄러움도 모르고[不識廉耻] 세상 권력을 좇아[望風隨勢] 그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며 살아가는 삶을 좇는다면[陰媚取寵]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양질호피와 똑같은 무리들이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이런 모습을 뉘우치고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其懲也夫]. 서산 스님은 말한다.
心染世利者 阿附權門 趨走風塵 返取笑於俗人. 此衲子以羊質 證此多行.
세상의 잇속에 마음이 물든 수행자가 권력에 아부하여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헛된 삶을 따라 다닌다면 도리어 세속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수행자는 겉보기에는 호랑이 같을지라도 그 바탕이 양처럼 어리석으니, 이는 이 말을 증명할만한 수행자의 잘못된 행실들이 과거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이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호랑이 흉내를 내어도 호랑이가 될 수 없으니 그 속내를 아는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옛 글에 “그 누가 알겠느냐? 헌 누더기 속에 온 누리를 밝게 비출 태양이 숨어 있는 것을![수지백납천창리(誰知白衲千瘡裡) 삼족금오철천비(三足金烏徹天飛)]”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누더기를 입고 살아가는 운수납자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