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개국 초 억불(抑佛)정책을 펴나간다. 사전(寺田)을 줄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승려의 수를 제한했다. 승려가 되려는 양반의 자제인 경우 포 100필, 서인(庶人)인 경우 포 150필, 천인(賤人)인 경우 포 200필을 관에 납부하게 해 국가의 재정을 확보했다. 승려의 신분을 낮추어 도성 안에 들어올 수도 없게 하는 등 사회적 활동도 제한했다. 이 같은 불교 탄압정책으로 인해 승려들은 사찰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문을 닫거나 산속에 은거(隱居)하게 된다.
사찰 주변에서 차 농사를 짓던 사찰 노비들은 자연히 차밭을 떠나고 차 생산량은 점차 감소하게 된다. 깊은 산속 절에서는 승려들이 직접 농사 지어 차를 수행으로 삼고 마시며 이용하게 된다. 또한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이 통제되면서 집안에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민간에서도 차가 마실거리로 확대되지 못하고 약용으로 이용되는 단계에 머문다.
하지만 일부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거나 그들의 이상을 표현하는데 차는 여전히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필수조건이었다. “오두막집에 돌아와 조용히 차를 달이고 나물먹으니, 근심 걱정 떨치고 속정 잊어버리기에 족하구나.” 이것은 매월당 김시습의 시다. 15세기 인물로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생육신(生六臣)이다. 산실(山室)을 짓고 차를 직접 채취하여 만들어 마시며 한 잔의 차로 세상의 번잡함을 씻고 속세에 구애 받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한 그의 이상세계를 수십 편의 다시(茶詩)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또한 왕실의 제례나 사신을 맞이할 때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 쓰인다. 공차(貢茶)제도와 다방(茶房)과 다시(茶時)도 여전히 남아 있어 조정에서는 차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들에게도 차세(茶稅)를 거두었다. 이처럼 차세만을 거두었지 농민들에게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수입을 위한 차를 육성하는 정책은 펼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차는 중국차에 의존해 우리의 토산차 개발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의 차 문화가 침체기를 맞이할 시기 중국이나 일본은 차 문화가 가장 번성한다. 일본의 경우 다도(茶道) 형식을 만들어 차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수출을 하기도 한다. 중국 역시 공차의 폐단을 없애고 백성의 고달픔을 없애기 위하여 단차(團茶) 금지령을 발표하여 지금 우리들이 마시는 새로운 잎차의 시대를 열게 된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은 다원(茶園)을 조성해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차를 수출하여 국력을 키우게 된다.
18세기 조선후기에 이르러 일부 지식인들은 차가 이용되지 않고 산간 지방에 방치되는 실정을 개탄하고, 차 무역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전남 진도에 유배했던 이덕리(李德履, 1728~?)는 <기다(記茶)>를 통해 당시 우리 백성들이 차를 몰라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차는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되고 민생에 이로움을 주는 것으로 차를 만들어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를 바랐다.
이처럼 서서히 조선의 차도 18세기 실학파들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