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은 종사가 참선을 하려는 사람에게 화두 드는 법을 가르칠 적에 두 가지 법이 있다. 하나는 화두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켜서 이 마음을 모아 화두에 몰입하여 화두를 온전하게 챙겨 나가도록 하는 ‘전제(全提)’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하나로 뭉쳐 모든 분별이 떨어져서, 화두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있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는 ‘파병(破病)’이다. 참선을 하려는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잘못 생각하여 병통이 생길 때, 이 병통을 고쳐주기 위하여 임시로 그들의 근기와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알맞은 방편을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학인을 지도할 수 있는 종사라고 할 수 있다. <선가귀감> 77장에서 말한다.
本分宗師 全提此句 如木人唱拍 紅爐點雪 亦如石火電光 學者 實不可擬議也. 故 古人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본분 종사가 몰입하여 온전하게 화두를 챙기는 모습은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박수치고 노래하는 것과 같으며, 바람에 흩날리던 한 점 눈이 시뻘겋게 달구어진 용광로에 떨어져내려 금방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같으며, 부싯돌이 부딪칠 때 번쩍하고 사라지는 불빛과 같다. 이 자리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어떻게 헤아려 볼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화상이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저는 돌아가신 스승의 도(道)와 덕(德)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 저를 위하여 도에 대하여 설파해 주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종사는 선종의 종지를 체득하여 부처님 마음을 전하는 스승이다. 부처님 마음에서 훌륭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맞이하여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종사 스님은 후학들을 다룰 때 그 근기와 주변 상황에 맞추어 눈을 부릅뜨거나 머리를 끄덕이며 때로는 할! 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주장자로 선상을 내려치기도 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하기도 하며 멱살을 움켜잡고 꼼짝 못하도록 몰아붙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종사의 ‘본분사(本分事)’이니 ‘본지풍광(本地風光)’에서 일어나는 임시방편이다.
본분 종사가 몰입하여 온전하게 화두를 챙기는 모습은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박수치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 화두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킨 덕으로 화두에 마음이 모아져 화두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화두와 하나가 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하나로 뭉쳐져 화두와 하나가 되어 온갖 시비와 분별이 떨어진 것이,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박수 치고 노래해도 알음알이가 없으므로 어떤 시비도 분별도 없는 것과 같다.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사람의 감정이나 의식이 있을 리 없으므로 박수 치고 노래하는 것 또한 정식(情識)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화두와 하나가 되어서 ‘화두를 챙기는 나’가 사라지고 ‘챙길 화두’도 사라져 주객이 함께 사라질 때, 이때가 바로 온전하게 화두를 챙기는 자리이다. 화두와 하나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화두와 하나가 되어 모든 시비와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던 한 점 눈이 시뻘겋게 달구어진 용광로에 떨어져내려 금방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 자리에서 중생의 시비와 분별로써 일어나는 온갖 번뇌가 눈을 깜짝 할 사이에 없어지는 것이, 마치 부싯돌이 부딪칠 때 번쩍하고 사라지는 불빛과 같다. 여기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고 어떠한 헤아림도 용납하지를 않으니,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이 자리는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물맛을 알듯이 오직 스스로 체득하여 알 뿐이다.
그러므로 동산(807-869) 스님이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저는 스승의 도(道)와 덕(德)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 저를 위하여 도에 대하여 설파해 주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동산 스님의 이 말은 ‘법의 스승’이 되는 운암 선사를 위하여 재(齋)를 올리면서 한 말이다. 운암 선사가 임종 때 일러준 법문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뒷날 강을 건너다 비로소 크게 깨치고 나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서주동산양개선사어록(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을 어록을 보면 여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산 스님이 운암 스님의 재를 지낼 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화상은 운암 스님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그 분 밑에 있었지만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데 재를 올리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분을 등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상은 처음 남전 스님을 찾아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운암 스님한테 재를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돌아가신 스승의 도와 덕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분이 저를 위하여 법을 설파해 주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화상이 돌아가신 스승을 위하여 재를 올리는 것은 그 분의 공부를 인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절반은 인정하고 절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완전히 인정 하지를 않습니까?” “만약 완전히 인정한다면 돌아가신 스승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말한다.
不道不道 恐上紙墨.
더 말하지 말라, 더 말하지 말라. 살아 있는 도가 죽은 문자로 변질될까 두렵구나.
깨달음이란 그 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여 그 자리로 몸소 들어가야 한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화두 참구를 하는 수행자라면 오로지 화두에만 몰입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비결이다. 화두를 말로써 알려고 한다면 큰 잘못이다. 동산 스님은 운암 스님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운암은 법에 대하여 설파하지를 않았다. 동산 스스로 선의 도리를 깨닫게 하였지 말로 이해시키려고 하거나 글로 해설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선종에서는 말과 지식으로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을 아는 마음과 마음이 맞아떨어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생명으로 한다. 이것을 모르고 말과 글로 깨달음을 설명하여 알려고 하면 살아 있는 도를 죽일 수도 있다. 선(禪)의 묘한 이 도리를 아는 자야말로 부처님의 세상을 아는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箭穿江月影 須是射 人.
화살이 강물에 떠 있는 달을 꿰뚫으니
독수리를 잡아내는 대장부로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