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에는 차가 의례나 수행의 도구로 사찰, 귀족과 조정에서만 사용되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문인들 사이에서 애용되기 시작한다. 사헌부 직원들은 다시(茶時)가 있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며 그날의 일을 확인하고 올바른 판결을 위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조정에서 차 마시는 시간을 갖는 것이 생활 속으로 이어져, 문인들의 모임이나 집안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자연스럽게 차가 준비됐다.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두어 차와 함께 시회(詩會)를 열어 시를 짓고 감상하며 사회를 풍자하기도 했다. 많은 문인들이 차에 관련된 시를 지어 세속에서 벗어나 그들의 이상과 사회의 부패를 표현했다.
이연종(李衍宗)은 공민왕이 머리를 땋고 호복을 입는 것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라고 간언했는데, 이에 왕은 기뻐하며 머리를 풀고 그에게 옷과 요를 주었다. 그가 박충좌에게서 차를 받고 지은 시가 있다. “어릴 때 절에 따라가 투다(鬪茶)놀이 하였지, 대숲에서 어린 찻잎 따서 스님이 만들어준 차, 찻잔 속의 유화 떠도 쉬지 않고 격불했었지, 돌아와 벼슬 따라 풍진 세상 치달으니, 이제는 병들어 한가로이 누웠네….” 한때 화려했던 정치가가 차를 선물로 받고 깊은 감회에 젖어 풍진세상의 허탈함을 표현한 시다.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 못한 늙은 서생이, 차 마시는 일에 세상사 잊고, 눈보라 치는 밤 서재에 홀로 누워, 돌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듣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처럼 고려의 정치인들은 세상의 시름을 차를 통해 달래고자 하였다.
이처럼 문인들은 차를 통해 속세를 잠시 잊고 꿈을 담는 정신을 지향했으며, 차를 통해 비애를 표현하였고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같은 문인은 차에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중에 특히 차의 공납(貢納)으로 인한 백성의 고달픔을 담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남쪽 사람들은 일찍이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아 위험을 무릅쓰고 덩굴을 헤치며 산속 깊이 다닌다. 수 많은(一萬) 잎을 따서 병차(餠茶, 떡차) 한 개를 만드니 병차 한 개가 천금(千金)으로도 바꾸기 어렵다네.”
지금은 기계화가 이뤄져 차를 따고 만들기가 편리해졌지만, 찻잎을 일일이 하나하나 따기란 여간 정성스럽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차는 따는 시기(時期)가 정해져 있어 여간 까다롭지 않다. 더구나 조정에 공납하는 차를 만들기 위해 시일(時日)에 맞추다보면 백성의 고충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관리들의 성화에 집안의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차 따는 일에 매달려 이렇게 만든 차는 ‘백성의 기름과 살’이라고까지 표현하였으니 그 당시 공차의 폐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산지(産地)에 다소(茶所)를 두어 차를 관리하고 보관하였으나 차가 직접 생산되지 않는 지역에서 산속에서 찻잎을 따고 가져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일정한 양을 공납토록 하였으니 이에 견디다 못한 차 농가들은 차밭을 불태우고 이주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공차 제도로 인해 차의 품질은 저하되고 생산량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