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과 화신이 참 부처는 아니다
報化雖然非眞佛
마음도 아니란 말 바로 마음이란 말
比心還與卽心同
곡조 비슷하여 들을 만하더니
依 似曲 堪聽
다시 바람 불어 다른 곡조로 드는구나
又被風吹別調中 -숭승공
위 게송, 1행에서 ‘보신과 화신이 참 부처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참 부처인가? 하는 질문은 2행에서 ‘마음’이 바로 법신인 참 부처다로 해석된다. 진리의 당체인 부처를, 곧 만유의 본체인 법신과 수행의 결과에 의해 유형으로 나타나는 보신,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이를 제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불신인 응신, 화신으로 나누어 말한다.
보신과 화신은 법신이 유형으로 나투는 형상불이다. 2행에서 ‘마음이 아니란 말, 그 자체가 마음이니’ 절대 긍정은 절대 부정이니 비심=즉심이고 즉심=비심이다.
3행에서 ‘곡조 비슷하여 들을 만하다’(依 似曲 堪聽)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즉심이고 비심이고 심은 심이니 글자와 발음 또한 같지 아니한가. 이런 언어희롱조차 같은 곡조에서 흘러나온다. 이와 같이 처음이나 끝 역시 근원에 이르면 맞닿아지므로 들을수록 하모니를 이루어 흥이 절로 난다로 읽혀진다.
마지막 행에서 ‘다시 바람 불어 다른 곡조로 들어간다’(又被風吹別調中)는 2행과 3행에서와 같이 고정 불변한 정상성이 진리인가 하는 마음을 깨트리는 핵폭탄과 같은 시구다. ‘즉심/비심’이 모두 진리이고 그 당체의 다른 표현이어서 그렇게 머무는 마음은 다시 번뇌 망상이니, 이 번뇌 망상이 흔들흔들 걸어가며 굴러가며 번뇌가 다시 보리가 되고 망상이 참 지혜가 됨을 형상화하여 “다시 바람 불어 다른 곡조로 들어간다”라는 결구로 마무리 짓고 있다. 마조는 심즉시불을 비심비불로 또 즉심즉불로 이어 심외무불로 반상합도 시키고 있다.
다음 목암충이 게송이다. ㉮의 게송은 즉심즉불을, 비심비불은 ㉯의 게송으로 노래했다. 각각 살펴서 감상해보자.
㉮ 서시의 맵시 뉘라서 따를까
西子顔容孰可
화장을 안 해도 스스로 풍류라
不塗紅粉自風流
홀연히 거리에 나가 대문 앞 지나면
忽從鬧市門前過
구경꾼 모여 쉼 없이 구경하네
引得傍觀看未休
㉯ 2월 봄빛에 경치 가벼이 들뜨다
二月春光景氣浮
어린 공자들이 거리에서 노닐다
少年公子御街遊
은 술상에 둘러 앉아 잔을 비위 즐기다
銀床坐宴傾杯樂
두 서너 아이들 말 타고 격구하다
三箇孩童打馬毬 -목암충
㉮의 게송 2행에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멋쟁이다’ 함은 마음의 본연을 나타낸다. 또 ’아무 것도 마음의 바탕을 따를 수 없다‘ 어떤 무엇에도 마음은 천연 그대로 대기대응(對機對應)한다. 거리에 나가 대문 앞을 지나는 이놈도 마음이고 쉼 없이 구경하는 이놈도 마음이니‘ 무엇 하나 머뭇거림이 없고, 한 찰나에도 끊김 없이 잘 닦인 거울과 같이 바로 대응하니 즉심즉불이라 한다. 중생들이 분별하는 양변의 마음을 송두리째 박살내니 이것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의 긍정법 사용이다.
㉯의 게송을 살펴보자. 2월의 봄빛에 살아나는 경치가 어찌 마음이라고 하랴.
어린 공자들이 거리에서 뛰어 논다. 은 술상에 둘러 앉아 술잔을 비워 즐기는데 무엇이 마음이고 무엇이 술잔이며 봄날의 풍류는 어떤가.
봄 햇살 등에 받으며 열심이 격구를 즐기는 아이들, 마음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니, 이 희희낙락하는 봄 속에 펼쳐지는 대긍정, 이 대긍정 속에 조는 사람을 위하여 마조는 서슴없이 부정법을 사용하여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은밀히 말한다.
마조 이후 중국의 선은 마조선으로 뒤덮이니, 돈오법을 천하에 널리 퍼졌다. 마조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입실제자를 두었는데 <전등록>에는 무려 139명이나 마조의 법사로 열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