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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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어느 것이고 병 아닌 것이 없다
훌륭한 의사가 병을 치료할 적에는 먼저 병의 근원을 찾으니, 병의 근원을 알아야 비로소 병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선하는 수행자가 도타운 믿음으로 오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온힘을 다하여 화두를 챙겨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나, 생사의 도리를 밝혀 내지 못하는 까닭도 대개 그 근원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 해 스무 해를 선방에서 흘려보내고 나이가 들면 주변 사람들이 ‘큰스님’, ‘종사(宗師) 스님’이라고 부르며 가르침을 청한다.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법문하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본디 말과 글로 부처님의 법을 희롱하지 않고, 평상시 생활 속에 쓰고 있는 마음자리를 돌이켜서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참뜻을 얻게 하려는 것이 종사 스님의 역할인데 이 스님이 생사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선가귀감> 76장에서 말한다.
宗師 亦有多病 病在耳目者 以 眉努目 側耳點頭 爲禪 病在口舌者 以顚言倒語 胡唱亂喝 爲禪 病在手足者 以進前退後 指東 西 爲禪 病在心腹者 以窮玄究妙 超情離見 爲禪 據實而論 無非是病.
종사에게도 병통이 많다. 눈과 귀에 병이 있는 이는 눈을 부릅뜨거나 귀를 기울이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선(禪)을 삼고, 입과 혀에 병이 있는 사람은 횡설수설 두서없이 지껄이고 함부로 할! 소리 지르는 것으로 선(禪)을 삼는다. 또 손발에 병이 있는 이는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며 이쪽저쪽 아무 데나 가리키는 것으로 선(禪)을 삼고, 마음속에 병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찾기 위하여 번뇌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으로 선(禪)을 삼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고 종사의 병통 아닌 것이 없다.
종사(宗師)는 부처님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선종(禪宗)의 종지(宗旨)를 체득한 큰스님을 가리킨다. 부처님 마음을 전하는 스승으로 부처님 마음에서 나오는 훌륭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맞이하여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분이다. 종사는 부처님 마음자리에서 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으므로 경사(經師)가 되고, 부처님의 생활을 그대로 실천하니 율사(律師)가 되며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걸림 없이 쉽게 풀어내므로 논사(論師)가 된다. 그러므로 종사는 경율론 삼장(三藏)의 종지를 체득한 삼장법사이며 학덕을 겸비하여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는 큰스님이다.
옛날에 종사 스님들이 후학들을 다룰 때는 상대방의 근기와 주변 상황에 따라 눈을 부릅뜨거나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할! 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였다. 주장자로 선상을 내려치기도 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하기도 하며 멱살을 잡고 꼼짝 못하게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본지풍광(本地風光)에서 일어나는 임시방편이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은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자면 무수히 많은 법이 생기게 되나, 나는 이 자리에서 그저 본분사(本分事)로만 사람을 대할 뿐이다

조주 스님이 말하는 ‘본분사(本分事)’는 ‘본지풍광’을 바탕으로 삼고서 하는 일을 말한다. ‘본지풍광(本地風光)’에서 ‘본지(本地)’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부처님의 마음자리이고, ‘풍광(風光)’은 이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옛 조사 스님들이 쓰는 독특한 ‘할!’이나 ‘몽둥이질’과 같은 법도 알고 보면 그 밑바탕에 본지풍광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본지풍광을 모르는 어리석은 종사들은 ‘할!’이나 ‘몽둥이질’과 같이 드러난 표현에만 집착한다. 그것이 본지풍광에 다가가기 위한 임시 방편인줄 모르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방편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낸다. 근본을 모르고 곁가지에 집착하여 그것이 부처님의 옳은 법이라고 시비하고 분별하게 된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근본을 몰라서 곁가지에만 집착하고 시비와 분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시비와 분별이 바로 생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시비와 분별이 심하면 심할수록 중생의 번뇌는 늘어난다. 조사 스님들은 중생의 이런 잘못을 바로 보시고 단숨에 이를 고쳐 주고자 한다. 그래서 본래 면목인 ‘본지풍광’에 임시방편으로 갖다 붙인 이름이나 허상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그 근본 바탕을 보라고 가르친다. 그 근본 바탕에 마음을 맞추어 그것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근본과 하나가 되어 근본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질 때 주객이 사라지고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다.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마음에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드러난다.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 그 근본 바탕에서 세상의 모든 법이 부처님 법이 된다. 조사 스님이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이 조사 스님이 된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법을 드러내거나 없앨 수도 있고 모든 법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종사들은 이 근본 뜻을 모르고 옛 조사 스님의 겉모습을 흉내 내어 시비와 분별을 일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殺父母者 佛前懺悔 謗般若者 懺悔無路.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님 앞에서 참회를 하나 반야지혜를 헐뜯는 이들은 참회할 길이 없다.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예전에 성인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들어야 할 것이 어떤 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어찌 눈을 깜빡이는 헛된 짓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시 억지로 나의 도를 끌어다가 하나로 꿰어 맞춰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스스로 믿고서 깨달아야 합니다. 설하는 내용을 듣기만 해서는 끝내 어디에 기댈 데가 없습니다. 스스로 보아야 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하며 스스로 믿고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자리를 설명하거나 그려낼 수 없어도 깨닫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설명해 낼 수 있고 모양을 그려낼 수 있다 해도, 이것은 오히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깨치지 못한 자를 다만 걱정할 뿐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잘난 척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반야를 헐뜯는 사람’이라고 하며,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끊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많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더라도 참회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종사라고 하면서 생사의 근원을 알지도 못한 채 법을 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할’을 한들 ‘방’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空中撮影非爲妙 物外追 豈俊機.
허공에서 그림자를 붙잡는 일도 우스운 일인데 세상 밖에서 헛된 자취를 좇는 사람들이 무어 그리 대단할까?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7-03 오전 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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