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법문 듣는 것에 대해서
요즘은 스님께서 직접 법상에서 법을 설하시는 대신 비디오를 통하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방에 계신 신도님들이 새벽부터 본원에 와서 법문테이프를 직접 청하여 듣는 것과 지방 같은 경우 그냥 선원이나 가정에서 비디오 법문이나 카세트를 통하여 듣는 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대답하기 이전에 내가 한번 이런 얘기를 해볼 테니 잘 음미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권투하는 사람들이 권투를 서로 하는데 이쪽은 이쪽대로 상황에 따라서 때리지, 정해 놓고 때리는 데가 없습니다. 그렇죠? 이쪽도 정해 놓고 맞는 데가 없습니다. 정해 놓고 때리고 정해 놓고 맞는 데가 없으니 그 가운데 뭐라고, 누가 맞았고 누가 때렸고, 어딜 때렸고 어딜 맞았고 이거를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비디오로 보든 그냥 이렇게 실제로 듣든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우리들의 환상이 진짜, 진짜입니까? 그것은 환상 놀음입니다. 컴퓨터에서 눌러서 놀이를 하는 것도 환상입니다, 그게. 근데 환상인데, 왜 환상이 아니게 보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느냐 하면, 그거는 댁의 몸이나 내 몸이나 몸은 공체(共體)입니다. 환상이란 말입니다. 환상인데 지금 내가 말을 하는 것, ‘이것이 어느 놈이 때린 거냐? 어느 놈이 어딜 때렸느냐? 어딜 맞았느냐?’ 그것을 음미해서 생각할 때 때린다고 하고 때리지도 않았고, 맞는다고 하고 맞지도 않았고, 어딜 때린 것도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됐죠? 그러니까 때린 사이도 없고 맞은 사이도 없는 거죠.
비디오를 본다고 해도 비디오를 보실 때에 여러분이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불이 들어오고 생각을 안 하면 생각 안 하는 대로 불이 안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건 자유입니다, 자유.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안 하면 모르지만 그 실체에도, 거기도 내가 있고 지금 여기도 내가 있는데 내가 있는 자체가 환상입니다. 이것도 환상, 그것도 환상. 그런데 댁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게 실천이, 실지가 되는 거죠.
‘과거도 현실로 봐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이 컴퓨터에서 놀이하는 거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왜 관하라고 했느냐? 당신들이 살기도 어렵고 괴롭고, 하는 일도 그렇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살아야만 되겠으니까 그렇게 해라 이랬습니다.
자기가 태어날 때 자기 모습은 부모의 인연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지만 생명의 능력은, 생명력은 자기가 가지고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자기 원소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생기면 바로 모습 아닌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되겠죠. 그게 ‘불성(佛性)’입니다. 그것이 천차만별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바로 절대적인 에너지처(處)입니다. 그래 주처(主處)라고 그러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주처를 자기가 각각 그렇게 영리하게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이 몸도 공체(共體)고, 공체이기 때문에 속에 제각기 모두 분리돼서 작용을 하게끔 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몸뚱이 속도 한 지구와 같기도 하고 우주와 같기도 하다 이런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가 하고, 누가 고통을 받고, 누가 그 문제가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당하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됐기 때문에 모습 있는 자기는 모습 없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단 얘깁니다. 진짜로 믿어야 태평해지죠. 진짜로 믿어야 갖다 맡겨도, ‘너만이 할 수 있어!’ 이렇게 맡겨도 그게 진짜로 실천으로 옮겨지고, 법이 땅에 한데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공법(空法)으로서 공용(共用)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질문하신 바대로 텔레비전을 보나, 누구에게 들으나, 지금 여기서 들으나,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듣느냐에 따라서 문제는 커지고 달라지는 겁니다. 육조 스님은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서 거기에서 깨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읽는 소릴 듣고. 그러니까 남이 읽는 소리나 하는 소리나 내가 지금 하는 소리나 뭐가 다릅니까?
새록새록 다른 말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 그대로,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하고 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하죠. 못 쓰죠. 말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말을 못하죠. 또 사용하는 것도 마음대로 사용치 못하죠.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 있어요? 마음대로 하려면 그대로 자기의 실체를 그냥 알아야 되겠죠. 그게 어렵다고 생각지 마세요. 그냥 자기한테 원소가 들어 있으니까요. 자기가 있으니깐 들어 있고요. 그 원소가 없으면 자기는 송장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요.
누구를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어요, 모두가 다.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요. 먹고 자고 행하는 것을 도무지 못하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와서 여러분이 걷고 여러분이 행하시라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해가 안 가시걸랑은 같이 공부해 나가시는 분들끼리 서로 토론을 자주 하게 되면 알게 될 겁니다. ‘너만이 알게 해 줄 수 있어!’ 하고 자기 불성, 주인공을 자꾸 찾아보십시오.
세상일에 무관심해지는데…
요즘은 일상생활에서나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근본을 믿고 주인공에 관하면서 생활을 하니 저 개인으로는 모든 것이 편안해지고 걱정거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이나 제가 하고 있는 사업과 주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상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일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편안하니깐 그러시겠죠? 우리가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하면서 ‘더러운 물도 바꿔 쓸 수 있다.’ 하는 건 이건 한 찰나입니다. 이 마음이란 것은 한 찰나에 그 모두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다 놓으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면서 그게 없어지는 겁니다. 바꿔지는 겁니다. 바꿔지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지니까, 편안하니까 ‘이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정도가 되죠. 바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도 들지, 바쁘면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써 원소를, 자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나온단 말입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 들어가서 모습을 받는단 얘기죠. 그래서 이 모습을 받는 데에 부모의 은공으로 받았다 해서 『부모은중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원소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렇게 진화하고 형성되는 그 고생은 모르죠. 즉 말하자면 태어나는 거는 자기 소관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부모의 소관이 아니라 자기의 소관이란 말입니다. 차원이 높고 낮고 그런 것도 자기의 소관이죠, 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습 있는 인연을 따라서 소중한 모습을 받은 그 모습으로 나오게 한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다. 그건 바로 즉, 만법을 행할 수 있는, 색색 가지로 만법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다 이런 말입니다. 에너지니까 그 에너지를 부처님께서는 ‘별성’을 봤다고 했고 또 불가에서는 ‘불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 주장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잘해서, 잘하면 한 등 올라가고, 올라감이 없이 올라가고, 우리가 문을 찾을 때 지혜롭게 찾아야 문 없는 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문을 찾아다니는 건 육신을 가진 사람이나 문을 찾아다니지, 육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문이 없어도 그냥 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이 그 원소 자체의 불성은 문이 없어도 왕래할 수 있는 겁니다.
아난이 “형님, 내가 형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니까 가섭 존자의 말이 “너 그렇게 들어오고 싶으면 열쇠구멍으로 들어오너라.” 이랬거든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어올 수 있으면 열쇠구멍으로 들어왔다가 가라 이겁니다. 열쇠구멍이 문도 될 수 있는 거라면 이 봇장이고 벽이고 그런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50%를 즉, 정신계로 활용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원소는 정신계를, 왼쪽 두뇌의 정신계를 말하고 또 바른쪽은 물질계를 말하는 겁니다. 이거를 혼합시켜서 이게 같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러분은 같이 돌아가는 거를 이해를 못합니다. 그거를 이해를 하신다면 정말이지…. 예전에 청담 스님이 대자대비라고 ‘대’자 둘을 이렇게 써 놓으신 게 있어요. 근데 누구든지 ‘대’자 둘을 써 놨으니까 대자비죠. 대자대비죠.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냥 걸어갈 뿐이야. 그냥 길을 하나, 이렇게 주장자를 그려 놨거든요. 누운 주장자, 선 주장자가 있거든. 누운 주장자를 그려 놨으니 그대로 갈 뿐이라는 얘기죠. 그러니 대자대비도 그렇게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대자대비니까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와선이니까, 누운 주장자니깐 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그냥 걷고 있다는 얘기죠. 우리가 머리에 하나의 지혜가 트이면 열 가지 백 가지가 트인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게 법이 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대로 결정이 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냥 활용이 되는 겁니다. 꼭 육체가 강을 건너가는데 한 걸음에 강을 떼어 놓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강을 떼어 놓을 때 한 걸음을 떼어 놔야 우리가 그 부처님 자리에 한 도량에 든다고 했습니다. 한 걸음으로, 한 강을 한 걸음으로 떼어 놔야 한 도량에 든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조금도 정신계의 문제나 물질계의 문제나 같이 반반 섞여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걸 이해를 못하고 그냥 간다. 그런데 모두 물질이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잘했다고 생각을 하니까 뭐든지 그게 핀트가 안 맞는 거죠.
그러니 자기 모습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니 자기가 결정을 짓지 말고 모든 걸 주인한테, 주처한테 맡겨 놔라. 그러니까 일할 때는 행선이고, 앉았으면 좌선이 되고, 또 길거리를 다닐 때는 입선이 되고 누웠을 때는 와선이 되느니라. 그것이 조금도 그른 사이가 없이 요만큼도 틈이 안 나게끔 돼 있는 자체다. 그게 그냥 참선이다, 여러 가지로 따질 게 없이. 참선이니까 우리 생활이 그냥 ‘도’니라. 우리 생활이 그냥 ‘도’니라, 이런 거예요. 우리 생활이 도지, 우리 생활 떠나면 뭐가 있느냐? 너가 떠나면 뭐가 있느냐? 하나도 없다. 모두 각자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종교도 있다느니 진리도 있다느니, 부처도 있다느니 세상도 있다느니, 에고도 있다느니, 또 편안함도 있다느니 이런 게 모두가 필요한 거죠.
장기 기증에 대해서
요즘 고도화된 과학으로 유전자 조작을 이용해서 생명체를 복제하고 질병을 치유하는데 유전자 조작으로 질병이 치유됐을 때, 치유되기 전의 그 업식은 어떻게 되는지요. 그리고 요즘 뇌사자의 장기 기증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였을 때, 장기 기증자가 강도나 또는 살생한 업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받은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요.
업식보다도요, 업식이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 몸체를 볼 때에, 육등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죠. 근데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육등 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그게 다 다르단 말입니다, 세포가. 다르니까 팀들이 다르단 얘기예요. 팀들이 다르니까 아, 생김생김도 다른 점이 있고요. 그러니까 세포를 가지고서, 유전자를 가지고서 사람 병 치료를 한다 이래도 그 유전자의 의식은 그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딴 데 있던 그 유전자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가서도 변함없이 그 짓을 할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예를 들어서 수술을 해서 치료를 했는데 뛸 줄도 몰랐던 사람이 아주 뜀박질을 잘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했는데, 수술을 할 때 그 유전자를 넣고 다리 부러진 그 틈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잘 뛸까요? 그 유전자는 차원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조금조금 생긴다는 얘기죠. 결부가 된다는 얘기죠. 그래 좋지 않은 거는 모르지만 좋은 거는 지금 말해서 장땡이죠, 뭐. 좋지 않은 거는 또 좋지 않은 대로 세세생생에 나갈 수도 있는 문제고요. 그래서 좋은 거 반이라면 언짢은 거 반이 거기 속한다, 이런 뜻이죠.
그리고 그대로 거기다 이식을 했다면 즉, 죽은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발전이 돼서 거기로 옮겨졌다면 그건 정말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자동 컴퓨터에서 지워진다면 별 문제지만 지워지지 못한다면 그건 대대로 내려가죠. 문제가 대대로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대대로 내려가는 거를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다 이거를 제거할 수 있다. 좋든지 나쁘든지 좋은 거는 좋은 것대로 승화시키고 나쁜 거는 없애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두뇌에 자동적으로 컴퓨터가 돼 있습니다. 입력이 돼 있다는 말입니다. 입력이 돼 있어서 현실에 나오는 거를 반드시 나올 때 거기다가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면서 새로 입력이 들어가는 대로 나온다 이런 소립니다.
지금 바깥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한 겁니다. 근데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공식(共食)으로서 공용(共用)으로 이걸 싸잡아서 해결을 하면 모든 게 해결이 되지 않겠나 이렇게 봅니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자기부터 알아서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이 생명체들의 생각들도 조절해줄 수 있는 능력이 첨부가 돼야 할 겁니다. 그러니 자기 먼저 알아가는 이 공부를 열심히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키우려면
요즘의 세상은 정보를 뺏기고 뺏는 시대입니다.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새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자기들끼리 교환을 하면서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까지 리드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컴퓨터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족쇄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요즘 들어 더욱 내 안의 에너지를 키워서 벗어나는 이 마음공부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내 마음의 에너지통을 키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뺏기거나 휘둘리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이익을 주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마음의 도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되겠다 이겁니다. 조그만 거, 이렇게 부실한 거 가지고서 논의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누르고 삽니다. 그렇듯이, 우리 자체가 바로 불성 자체, 별성의 근본이기 때문에 에너지통이 그냥 여기 들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작으나 크나, 차원이 높으나 낮으나 그거를 알고 진행한다 하면 그냥 자기가 자꾸 크게 만드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아쉬우면 꺼내 쓸 수 있는 거, 전력을 그냥 꺼내 쓸 수 있는 거. 그것이 에너지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지구 바깥에, 우주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자체 내에 있기 때문에, 내 자체 내에 그 문이 있기 때문에, 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단 얘기죠. 그러니까 이 속에, 암흑 속에는 에너지를 발현할 수가 있고 이 거죽에 속하는 데는 에너지를 발생해서 쓸 수 있는 데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눌렀을 때 이걸로도 변하게 하고 이걸로도 나오게 하고 저걸로도 나오게 하고, 부산으로도 갔다가 제주도로도 갔다가 이렇게 누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천국에도 갔다가 지옥에도 갔다가, 서울로 왔다가 부산으로 갔다가 이렇게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한번 대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컴퓨터에 하는 사람들이 남한테 뺏길 필요도 없고 뺏을 필요도 없이 아주 성스럽게 살 수 있는 문제가 생기죠. 지금은 악과 선을 만들어서 이렇게 싸우게 해서 재미를 보게 모두 했거든요. 그러나 악과 선을 안 넣어도 재밌는 구절이 구절구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이 미생물로 인해서 조그맣게 생명이 생겨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진화가 되고 사람까지 몇 번씩 태어나도 그냥 그 자리를,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죠.
그러니까 세세생생, 우리가 지금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난다면 세세생생을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죠. 어디에 갇혀서 우리가 산다고 보세요. 병 속에서 갇혀서 산다 이런다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답답함을 느끼죠. 자유스럽게 훨훨 날아다닌다면, 구속받지 않고 날아다닌다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거를 내가 갖는 거보다도 모든 걸 주는 거, 주는 새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이지 그건 천국이죠. 자연적으로 천국이 되죠. 왜냐하면 요만한 애들도 그렇고, 이만한 애들도 그렇고, 늙어도 그렇고 다 천국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이날까지 그렇게 궁색하게 싸우고 살아왔기 때문에, 뺏고 뺏어 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정신계까지 뺏으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뺏고 또 뺏기고 이러지 말고 서로 줄 수 있고, 서로 받을 수 있고, 서로 주지 않고도 살 수 있고….
이 사람이 먹는 걸로 인해서 더군다나 더 싸워지는 문제도 있죠. 먹는 걸로 인해서 싸우고 죽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공부를 해서 이게 활딱 벗어난다면 먹고 살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죠. 에너지가 왜 필요한데요? 우리가 에너지가 없으면 그냥 송장이 되는 거예요. 지금 에너지라고 이름을 해 놨으니까 그냥 에너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거, 이거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지구가 만약에 버스라든지 배라고 한다면 그런 데에 걸상을 전부 늘어 놨다면 그 걸상 하나 가지고 이거는 무슨 종교 이거는 무슨 종교 이러고서 싸우는 거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거는 이름이지, 그 종교가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우리가 어떠한 말로든지 동일하게 부를 수 있는 그 진리, 진리를 우리는 숭상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우린 진리에서 이렇게 생명을 가지고 나왔고 진리에서 진화가 됐고 진리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융통성 있는 인간으로서 이게 발전을 했으니까요.
인간이라 할지라도 진짜 인간으로서 활딱 벗어나진 못했다 이런 소립니다. 그런데 그래도 내가 나라 그러고 그렇게 그냥 당치 않은 어깃장을 부리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따진대도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저 거듭거듭 고생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어떻게 살다 보니까 40이 넘고 50이 되더라. 50이 돼서 ‘애들하고 어떻게 좀 살아 봐야지.’ 하고 살다 보니까 머리가 벌써 허옇게 늙었더라. 이러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도 그냥 에너지로다가 그냥 원소가 있었다면 그렇게 구석구석 모를 텐데 부모의 은공으로서 몸을 받았단 말입니다. ‘이렇게 너는 몸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모두 살아나갈 때 어떻게 어떻게 살아나가며, 어떻게 서야 되며,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어떻게 누워야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좀 알아라.’ 하고 했는데 눕는 것도 잘 모르고 앉는 것도 잘 모르고, 일하는 것도 잘 모르고 자는 것도 잘 모르더라 이런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이걸 알아야 하는데, 죽기 전에 알아야 하는 거지 죽은 뒤에 내가 공부가 되느냐 이겁니다.
부딪침이 있어야 공부가 되죠. 서로가 있어야 공부가 되죠. 그래서 죽은 영(靈)들을 왜 탑에다 모셔놓든가 그렇게 해 놓고 공부를 시키게끔 하느냐. 우리 자손들이 화장을 시켜서 탑에다 우리를 그렇게 모신다면 그 자손들이 공부하는 대로 그걸 배울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잠시잠시 들고 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해서 그냥 병 속에서 나가듯이 나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래 자손들이 그거를 알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어떻게 됩니까? 살아생전에 벌써 병을 다 부쉈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갈 때도 나가는 문이 없고 들어올 때도 들어오는 문이 없더라.
그러니까 자재권이라는 것은 나한테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재하더라. 그러니까 권리가 있다 이겁니다. 어디든지 권리가 있다. 어디든지 가서 같이 할 수가 있고, 어디든지 가서 분류할 수가 있고, 어디든지 가서 이거는 바꿀 수가 있다 이겁니다. 색상을 바꿀 수가 있다. 모습을 바꿀 수가 있다. 바꿀 수 있는 세상에서는 바꿀 수 있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세요. 막말로 뱀이다 개구리다 뭐 다른 짐승이다 이렇게 할 때 서로 접촉도 안 해 봤는데 사람이 거기 탁 들어가 보세요. 저항력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쪽도 아주 겨냥을 단단히 하고 그렇게 저항력을 느끼겠죠. 그러니까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너는 어떤 걸로든지 건지려면,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너는 어떤 거든지 건질 수 있어야만 된다. 여자가 되면 여자가 될 수 있어야만 되고 창녀로 있는 거를 건지려면 창녀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창녀 속에 들어가서 창녀가 될 수 있어야 된다 이런 문젭니다. 그러니 그게 말이 그렇지 수가 없는 거죠. 헤아릴 수가 없는 거죠. 닥치는 대로니까요.
여러분이 내가 말하는 걸 복잡하게 듣지 마시고요, 좀 간편하고 쉽게, 그냥 쫀쫀하게 이렇게 하지 마시고 좀 느슨하게 풀어 놓으시고, 허리띠를 너무 꼭 매면 체하기도 쉬우니까 조금 느슨하게 헐렁하게 좀 매 놓으시고, 흘러내리지만 않게 하시고 사신다면 그게 얼마나 유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이지 허리띠를 꼭 매고 일을 할 때는 꼭 매야죠.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