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는 신라의 전통 문화와 신앙을 이어 민족의 신앙으로 도가(道家)와 선종(禪宗) 중심의 불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당시 외국과의 문물교류가 활발해 외국 사절단과 무역업자들이 들어올 때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 개성의 옛 이름)에는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무역선은 고려의 연등회나 팔관회에 맞추어 배를 출항시키기도 했다. 고정적인 상점 외에도 노상(路商)이 형성되었으며, 귀족, 관리, 상인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문물교류가 활발했다. 이러한 교역 물품 중에 차가 왕실과 귀족층의 하사품과 선물로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찰과 민간에까지 널리 확대되었다.
고려 태조는 그의 자손들이 후대에 꼭 지켜야할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천령(天靈)ㆍ오악(五嶽)ㆍ명산대천(名山大川)ㆍ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려 왕실은 국가의례로 매년 11월 팔관회와 2월 연등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때 왕이 직접 진차(進茶) 의식을 베풀었는데, 이러한 의식은 임금이 신하에게 차를 올리라고 명하면 차를 올리게 된다. 태자와 신하들에게도 차가 주어진다. 이렇게 해 모두 차를 마시고 나면 술이나 다른 음식들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나오게 된다.
왕자의 책봉과 공주를 시집보낼 때도 진차 의식이 이었다. 이처럼 차 의식은 복잡한 형식이 있기보다는 술, 과일, 음식이 나오기 전에 차를 올리는 의식이었다. 조정에는 이러한 절차를 관장하기 위해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다방은 주로 종묘제사나 외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일, 각종 의례 및 연회 등을 관장했다. 행로(行爐), 다담(茶擔), 군사(軍士)등이 있어 행사를 주관했으며, 지다방사(知茶房事)라는 책임자를 두어 다방을 관리했다.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의 큰 연중행사에는 외국사절단이 참석을 하기도 했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팔관회에 직접 참석을 했다. 서긍은 “한국의 토산차는 그 맛이 쓰고 떫어서 입에 넣을 수 없으니 오직 중국의 뇌차와 용단차를 귀하게 여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중국차만이 아닌 우리의 토산차가 의식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차는 왕이 하사를 하거나 상인들을 통하여 판매가 된다”고 <고려도경>에서 밝히고 있다. 고려의 차는 왕실에서만이 아닌 민간에서도 널리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유학승들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차가 사찰에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고 사찰의 필수품이 된다. 산간의 작은 사찰은 직접 차를 재배하기도 했지만 큰 사찰들은 주변의 가까운 마을에서 차를 재배하도록 해 공급받았다. 사찰 주변에는 차를 재배하는 마을인 다촌(茶村)이 형성되었다. 품질이 좋은 차는 사찰과 왕실, 관리들에게 상납되었다. 특히 사찰에는 다각(茶角)이 있어 차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아서 하였다. 승각(僧角)또는 다동(茶童)이라고도 불렀다. 주로 승려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이 사찰에서 기거를 하면서 차에 관련된 심부름을 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관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사노(寺奴)를 데려와 그들이 승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고려시대 사찰의 차 문화는 한국 차 문화의 명맥을 이어오는 줄기가 된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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