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5.11 (음)
> 종합 > 기사보기
<75> 본지풍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참선하는 사람들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공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성품인 자신의 본바탕을[本地] 알면, 저절로 흘러넘치는 온갖 지혜[風光]로써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이다. 태양처럼 밝은 부처님의 지혜가 넘쳐흐르는 이런 자비심 없이 수행자가 고요한 선정에만 집착하여 그것이 공부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면 병이 깊은 것이다. <선가귀감> 75장에서 말한다.

禪學者 本地風光 若未發明則 孤 玄關 擬從何透. 往往 斷滅空以爲禪 無記空以爲道 一切俱無以爲高見 此冥然頑空 受病幽矣. 今天下之言禪者 多坐在此病.

참선하는 이들이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드러내지 못하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꿰뚫을 수 있겠느냐? 더러는 ‘단멸공(斷滅空)’을 선(禪)으로 삼기도 하고, ‘무기공(無記空)’을 도(道)로 삼기도 하며,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진 경계’를 높은 소견으로 삼기도 하니, 이들은 모두 깜깜한 경계에 집착하는 완공(頑空)으로서 병이 깊기만 하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위 모두 이 병에 걸려 있다.
‘본지풍광(本地風光)’에서 ‘본지(本地)’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풍광(風光)’은 이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본지풍광’을 달리 말하면 보조 스님이 <수심결(修心訣)>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공적(空寂)’이라 하고, 이 공적한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지혜로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신령스런 앎을 ‘영지(靈知)’라고 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마음자리인 선정 속에서 밝은 지혜가 드러나고 밝은 지혜 속에 고요한 마음자리가 있어야 진정한 부처님의 세상이 다가온다.
‘단멸공’이란 화두를 챙길 때에 마음을 잘못 챙기므로 ‘공(空)’에만 집착하여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하고 깜깜한 경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행자는 이 자리를 화두공부의 마지막인 줄 알고, 이 고요한 경계에 안주하고 집착하여 더 이상 공부할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 경계를 ‘침공체적(沈空滯寂)’이라고 하니, 이 경계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경계이므로 ‘무기공’이라고 한다. ‘무기(無記)’에서 ‘기(記)’는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하여 기록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무기는 선으로 단정할 수도 없고 또한 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어 선도 악도 아닌 성품을 말한다. 이 텅 빈 성품에만 집착하여 깜깜한 곳에서 더 이상 화두를 챙기지 않고 안주함으로써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무기공’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수행자들이 이 경계에서 ‘일체구무(一切俱無)’라고 하여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높은 소견으로 삼기도 하는데, ‘단멸공’이나 ‘무기공’이나 ‘일체구무’는 공(空)에 집착함으로써 깜깜한 경계에 떨어져 생기는 병이니 모두 ‘완공(頑空)’이다.
환한 자리에서 신령스런 앎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행자들이 이처럼 ‘단멸공’이나 ‘무기공’ 또는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진 경계’에 집착하여 화두를 더 이상 들지 않고 마니 그 병은 깊기만 하다. 부처님 세상이 환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수행의 마지막 자리에서 뚫어야 할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孤
玄關]’을 꿰뚫을 수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이란 참선 수행자가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목숨 걸고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의 생명은 화두이다. 이 화두를 통하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무명을 다 떨쳐야 비로소 공부를 마칠 수 있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向上一關 措足無門. 雲門云 光不透脫 有兩種病 透過法身 亦有兩種病 須一一透得始得.

깨달음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미세한 번뇌도 발붙일 곳이 없다. 운문 스님은 “마음의 빛이 모든 번뇌를 꿰뚫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병이 있고, 마음의 빛이 법신을 꿰뚫은 뒤에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모름지기 하나하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꿰뚫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글은 대혜 (1089-1163)스님의 <서장>에서 인용한 글로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나와 있다.
“운문(864-949) 스님은 말한다. 마음의 빛이 모든 번뇌를 꿰뚫지 못하는 데에 두 가지 병이 있다. 모든 곳에 밝지 못하므로 눈앞에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이 하나이다. 또 하나는 모든 법이 공(空)임을 꿰뚫었더라도 은근하게 어떤 경계가 있는 듯해서 또한 마음의 빛이 마지막 무명을 꿰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법신(法身)에도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에 다가갔더라도 법집(法執)을 떨치지 못했기에 자기의 지견이 아직 남아서 법신 언저리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이다. 또 하나는 설사 법신을 꿰뚫었더라도 화두를 놓쳤다면 곧 무슨 기척이 있는지를 꼼꼼히 점검할 수 없으니, 이 또한 병이다.[不見 雲門大師 有言 光不透脫 有兩般病 一切處不明 現前有物 是一 又 透得一切法空 隱隱地 似有箇物相似 亦是光不透脫 又 法身 亦有兩般病 得到法身 爲法執不忘 己見猶存 坐在法身邊 是一 直饒透得法身去 放過 卽不可子細檢點來 有甚 氣息 亦是病]”

대혜 스님께서도 수행자가 넘어야할 마지막 관문인 이 경계는 아주 미세한 번뇌만 남아 있는 곳이니 중생들은 참으로 알아채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중생들뿐만 아니라 성인에 가까운 십지(十地) 보살들도 알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알기 어려운 곳이지만 화두 수행자는 화두에 의지하여 화두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공부를 지어나가야 한다.

어려운 수행이지만 그 수행의 가치를 알고서 기쁜 마음으로 맑고 향기롭게 닦아 가는 수행만이 아름다운 부처님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 병을 알면 도리어 향기로운 약이 되어 공부를 해 마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향기로운 꽃밭 길을 거치지 않고
아름다운 꽃동네엔 가기 어려워.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6-26 오후 5:34:28
 
 
   
   
2025. 6.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