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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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눈’ 감으라는 소린가
터무니없는 비난, 아니 정당한 비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누구나 화가 나게 마련이나, 그 화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평소 진심(嗔心)에 대한 수행을 쌓아 온 사람이라면 어지간한 비난이나 비판에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능력과 자신감이 넘치는 투명하고 당당한 사람이라면 ‘그러려니’할 것이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난이나 비판에 ‘발끈’하는 사람은 능력과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 등 여러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부분을 감추려 든다.
‘부시의 푸들’이라는 모욕적인 빈정거림에도 태연했던 영국 토니 블레어 수상의 예는 자유민주화의 성숙도 높은 영국적 사회분위기가 만들어 낸 것일 터이나, 기원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페리클레스 등 권력자가 “권력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이 비판”이라며 그들에게 비판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다는 것은 바로 능력과 자신감에서 나온 예가 될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려 비판자체를 원천 차단한 로마 황제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비판의 자유 존중’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열한 비판정신은 불교경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유마경>이다. 이 경전에서 유마거사는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한 명 한 명에게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그렇게 당한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유마거사를 감당 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거사의 병문안을 회피하려 한다. 성인반열에 든 사람이라 해도 이처럼 자신에 가해지는 비판을 두려워하는데 평범한 속인은 말 할 것도 없고 하물며 속세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모든 권력과 권위가 언론의 바른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취임 초부터 언론과 각 세우기로 유명세를 더한 현 정권이 그 말기인 요즘 ‘취재하지 말고 부르는 데로 받아쓰라.’식의 언론활동 제약을 시도하고 있다.
각 부처에 있는 기자실을 통폐합하고 상주기자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자실 운영시스템을 바꾸며 담당공무원 직접취재는 원칙적으로 불가, 모든 취재를 공보관 실을 통해 하도록 하며 등등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그야말로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어쩌면 해외토픽 감으로도 모자람이 없을 듯한 이러한 조치를 왜 하는 것일까? 무엇을 그리 덮어두어야하며 무엇을 그리 감추어야하는 것일까?
19세기 프랑스 문호 발자크는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란 글에서 부정적인 기자 상을 혹독하게 나무라고 있다. 신문기자에 논설위원, 사장까지 했던 현장의 눈으로 비판한 것이니 반론의 여지도 없다.
‘정치드라마의 연출자’ ‘힘없고 고립된 사람들을 향해서만 자유롭게 말하는 기자.’ ‘ 칭찬만 할 줄 아는 무비판의 기자’ 등 10여 년 전에는 미국의 한 사회 비평가가 ‘보도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게으른 기자’에 대해 쓰기도 했다.
현 정권의 언론 정책은 바로 위에 지적된 기자 상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언론인의 자질을 몇 세기 전으로 되돌리고 차원을 한참 낮추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이번에 내 놓은 언론정책은 국민들에게 정권 스스로의 무능과 열패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김징자 /칼럼니스트
2007-06-21 오전 10: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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