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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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마음과 경계를 다 잊어야
사람들은 좋고 아름다운 바깥 경계에 마음을 빼앗긴다. 예쁘게 화장하고 옷맵시를 멋있게 챙겨 외모를 가꾸며 남의 눈에 띄는 명품을 지니려는 요즈음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렇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내면의 뜰을 가꾸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는 마음의 향기가 배어 있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아무리 멋져 보이는 경계라도 그 인연이 흩어지면 바깥 경계는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어서 집착할 게 없다. 집착할 것이 없으므로 허망한 바깥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챙기면서 실속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수행자라고 부른다. <선가귀감> 71장에서 말한다.
凡夫取境 道人取心 心境兩忘 乃是眞法.
보통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경계를 따르고 도를 닦는 사람들은 마음을 취하려고 하나, 마음과 경계 이 두 가지를 다함께 잊는 것이야말로 참된 법이다.
범부(凡夫)’는 보통 사람들을 말한다. 수행의 위치에서 말하면 아직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진실에 대한 사제(四諦)의 이치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무명 때문에 업을 짓고 그 과보를 받아야 하므로 자유롭지가 못하고 온갖 나쁜 길로 떨어지게 된다. 이 중생들은 육도(六道)에서 받는 과보에 따라 온갖 다른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생(異生)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직 도(道)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다. 대승에서 분류할 때는 초지(初地) 이전을 범부라고 한다.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 向)의 삼현(三賢)을 내범(內凡)이라 하고 십신(十信)을 외범(外凡)이라 하는데, 외범 이하를 범부라고 한다. 또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과 같은 네 분의 성현인 사성(四聖)은 육도윤회를 벗어나 있지만, 범부들은 육도에서 생사유전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합쳐서 여섯 종류의 범부인 육범(六凡)이라 말하기도 한다. 지옥 중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아귀, 축생, 수라, 인간, 하늘에 있는 중생들까지 다 포함한다. 이 범부들은 눈앞에 보이는 경계만을 따른다.
‘이승(二乘)’에서 ‘승(乘)’은 태워서 운반한다는 뜻이다. 중생들을 태우고 생사의 바다를 건너가는 내용을 두 종류로 나누기 때문에 이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이승은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내용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부처님이 한평생 가르치신 교법(敎法)의 내용을 크게 나누어 대승과 소승으로 나눈 것으로서, 성문 연각을 위하여 방편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소승이라 하고, 보살을 위하여 성불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을 대승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소승을 분류하여 성문승과 연각승으로 나눈 것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고집멸도 사제의 이치에 힘입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성문승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혼자 십이인연의 가르침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연각승이라고 한다. 소승에 속하는 이 이승은 도를 닦는 사람들이지만 도를 닦는 과정에서 마음에 나타나는 좋은 경계에 집착하여 마음을 취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말한다.
取境者 如鹿之 空花也 取心者 如猿之捉水月也 境心雖殊 取病則一也 此合論凡夫二乘
눈앞에 보이는 경계를 취하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가 물인 줄 알고 좇아가는 것과 같고, 마음을 취하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바깥 경계와 안의 마음이 다를지라도 이것에 집착하면 병통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는 범부와 이승의 병통을 함께 말해 놓았다.
바깥의 경계가 객관이라면 안의 마음은 주관이다. 그렇지만 눈앞에 보이는 바깥 경계는 온갖 인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니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범부들은 바깥 경계가 존재하는 줄 알고 그 경계에 집착한다. <능가경>에 이르기를 “먼 산의 아지랑이가 햇볕에 반사되어 흐르는 물처럼 보이자 목마른 사슴이 물로 알고 좇아가듯이, 범부가 눈앞에 보이는 육진(六塵)의 경계를 좇아가는 것도 그와 같다”라고 하였다. 범부는 보이는 빛깔, 들리는 소리, 냄새와 맛 느낌 등의 경계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여 따라가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이루어진 거짓 형상일 뿐이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내 안의 마음도 중생의 시비 분별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 실체를 찾아보면 허공의 꽃과 같으니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승은 눈앞에 보이는 경계가 본디 허망한 것인 줄 알지만 마음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마음을 붙잡으려고 한다. <현우경(賢愚經)>에서 이르기를 “달 밝은 밤에 원숭이들이 우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고,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숭이 줄을 만들어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달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마침내 허탕을 쳤다”라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알고 보면 저 물 속의 달과 같이 허망한 것인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여 온갖 욕심을 불러일으키니,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그런 허깨비 놀음에 속고 살겠는가?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天地尙空秦日月 山河不見漢君臣
푸른 하늘 넓은 땅에 진나라의 해와 달이 보이지 않고
드넓은 산하에서도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을 찾을 수 없네.
“푸른 하늘 넓은 땅에 진나라의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진나라 시대에는 해와 달도 진나라의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의 해와 달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보는 관점인 주관이 사라지면 보이는 관점인 객관도 사라진다는 뜻이니, 범부가 사라지면 범부의 경계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드넓은 산하에서도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을 찾을 수 없네”라고 한 것은, 한나라 시대에는 드넓은 산하에서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주인 노릇을 하였는데, 한나라가 망해 없어지고 나니 그 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임금과 신하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드넓은 산하로 비유한 마음이라는 것에도 주인 노릇을 하는 일정한 주체가 없다는 뜻이다. 중생의 시비 분별로 이루어진 마음 그 자체가 사라지면, 이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중생의 시비 분별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범부는 보이는 경계에 집착하고 이승은 마음에 집착하는데,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중생의 시비 분별은 끝없이 이어진다. 범부와 보이는 경계가 사라지고 이승과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텅 빈 충만의 자리 그곳이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며 부처님의 세상인 것이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5-29 오전 10: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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