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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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으로 가는 ‘길닦음’

춤은 보고 즐기는 몸의 움직임만이 아닌 응축되었던 정신이 드러나는 하나의 의례이다. 삶의 참 의식이다.
지난 6월 9일 민주항쟁 20년을 기념하며 춤을 추었다. 그날의 춤 역시 하나의 의식을 치루는 춤판이었다.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 역사를 맞이하는 역사에 대한 지극한 의례였다.
1987년 2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1월. 박종철 물고문 사건이 터진다. 우리 모두를 정신까지도 숨까지도 얼어붙게 만든 물고문 치사사건. 여기저기서 선·후배, 동지들의 각종 고문당한 이야기가 수런수런. 극악하고 무도한 그 사건들.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서 처참하게 짓밟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인간성을 교란시킬 수 있는 그 행위들.
누가 누구를 무엇이 한 인간을 그토록 짓밟을 수 있는가. 나 역시 연습실도 안주할 곳도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모두 얼어붙은 정국.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는 것. 그럴수록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어떻게 풀 것인가. 그 겨울에 인간성이란 인간의 도덕성이란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그 과정에서 무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통. 그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구체적인 내용들은 어떻게 잡을 것인가. 우리들의 이야기, 이미 다 알고 있는 사건들만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상징적으로 모아진 사실적 이야기. 생명의 탄생, 자람, 꽃 피움, 죽음, 다시 태어남 등으로 생명의 일생으로 틀을 잡았다.
씨가 땅에 떨어져 물과 불로 발아되고 자라면서 꽃 되어 열매 맺고 일생을 마감하는 생명의 보편적 틀. 그러나 물과 불 기운이 넘칠 때 파괴되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 부당한 힘들. 처절한 마감을 하고 그 죽음이 거름되어 다시 피어나는 꽃. 결국은 생명의 일생이고, 사람 일생의 이야기로 압축된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예술로 승화시켜 풀어나갈 것인가.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이 가능할 것인가. 마침내 씨 · 물 · 불 · 꽃 등 생명의 구성요소로 압축되고 씨춤, 물춤, 불춤, 꽃춤으로 구체화되었다.
드디어 춤은 ‘바람맞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 춤은 연우무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서 펼쳐졌고 곧 시국춤, 한풀이춤 등으로 기사화되면서 큰 불길로 번져나갔다. 연세대 이한열 장례식장, 인천 공장마당, 거제도 대우조선소, 태백탄광, 홍제동 성당, 전국 여러 대학 등 끝없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춤은 처절함을 넘어선 죽음과 삶 그 자체였고, 첨예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다름 아닌,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었다. 결국은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20년 후 그 바람맞이는 오늘날의 상생평화춤으로 되살아났다. 역사 속의 죽음이 태초의 인간의 정신으로써 현재의 정신으로 되살아났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려지며 그 영혼의 생명력은 우주정신, 본성으로 되살아났다. 한 빛, 한밝춤으로 되살아났다.
춤 한 걸음은 백 년, 천 년, 억겁 만년을 걷는 윤회의 한 걸음이고, 한 번 휘돌리는 팔 사위 너울질은 역사를 휘돌리는 한 사위이다. 그 한 걸음이 쌓여 삼진삼퇴(三進三退)가 이루어지고 너울 사위가 겹쳐지며 바람이 되고 태풍으로 몰아친다. 그 모두는 수족상응(手足相應)으로 상생하여 태평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오늘의 상생평화춤이다.
1987년 바람맞이나, 2007년 상생평화춤이나 다름 아닌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이었다. 결국은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춤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닦음이다. 춤은 깨달음에 이르는 정신수행이다.
이애주 무용가·서울대 교수
2007-06-19 오전 9: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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