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거세니 나뭇잎이 자주지고
風 葉頻落
산이 높으니 해가 쉽게 가리운다
山高日易沈
좌석 가운데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坐中人不見
창밖엔 뭉게뭉게 휜 구름 짙어라
窓外白雲深
-장령탁 <선문염송> 5권 159칙 ‘즉심’
어느 날 마조에게 한 학인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 하십니까?”(和尙爲什 說卽心卽佛)
“우는 아기의 울음을 그치기 위해서지.”(爲止小兒啼)
“울음이 그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하지.”(非心非佛)
“그럼 이 두 가지 외에 사람이 와서 물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내 그런 사람에게는 물건도 아니라고 하지.”(向伊道不是物)
“스님 그런 사람이 왔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에게 무상대도를 구현하라 하겠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지금 자네의 뜻은 무엇인가?”(卽今是什 意)
이어서 방온거사가 물었다.
“물은 뼈도 힘줄도 없이 만곡의 배를 이겨내는데, 그 이치는 어떤 것이지요?”
“여기는 물도 없고 배도 없다. 그런데 무슨 힘줄과 배를 말하는가?”
龐居士問 如水無筋骨能勝萬斛舟 此理如何 師云 這裏無水亦無舟 說什 筋骨
(<경덕전등록>제6권 ‘강서 도일선사’)
앞 선화에서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이 긍정과 부정을 돌이키는, 얼마나 반어적인 기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장(師丈)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학인을 제접 시, 이런 현 상태를 초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스승의 간절한 마음을 엿보게 된다. 이것은 6조가 말하는 이항대립적인 36대의 법문을 펼쳐 학인의 의심을 바로 일원적인 통일성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학인으로 하여금 양변견적인 모순을 벗어나 광명의 세계에 계합시킨다. 곧 자성의 세계에 영회시키고자 하는 스승이 휘두르는 진검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방온거사의 물음에 마조는 더 깊숙한 곳, 즉 자성의 본체에는 ‘있다/없다’가 모두 공함을 드러낸다. 진실로 언설을 떠나고(離言說) 사유가 끊기는(絶思量) 반야가 자발광(自發光) 하는 곳이다. 모두의 장령탁 게송은 이 선화를 밝힌 후대 선객의 노래다.
1행과 2행은 마음의 운행을 나타내는 구절. 마음의 운행이라 하여 특이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바람이 거세니 나뭇잎이 자주지고/산이 높으니 해가 쉽게 가린다” 이니 다름 아니라 자연이 저절로 풀어놓는 운행, 삶의 자연스러운 운행이 마음의 운행일 뿐이다. 이러할 진데 3행과 같이 “좌석 가운데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는 당연하다. 눈을 눈동자가 보지 못하고, 불이 불동자를, 물이 물처녀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듯이 ‘좌석 가운데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이 보임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4행의 “창밖엔 뭉게뭉게 흰 그름 짙다”(窓外白雲深)이다. 그 외에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마조 도일은 우는 아이를 위해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그리고 울음을 그친 아이, 스스로 편안함에 안주하는 사람을 위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는 부정법을 휘두른다. 이는 6조의 법을 착실히 계승한 증거다. 바로 울음 우는 아이와 같이 부정으로 공격하면 즉심즉불이라는 긍정법으로 막아내고, 울음을 그친 아이와 같이 긍정에 안주한 사람에게는 비심비불과 같은 부정의 진검을 휘두른다.
앞 장령탁의 게송은 마조의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의 시적 형상화이며 마조의 심외무불(心外無佛), 그 자체에 대한 깨우침의 시이다.
※착어 : 즉심 비심 즉불 비불 고만고만하여 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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