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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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스님(1)
어떤 학인이 만공(滿空1871∼1946)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佛法)이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느니라.”
“눈앞에 있다면 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느니라.”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하느니라.”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는 누구냐?”
진리는 항상 눈앞에 있다. 불법은 지금 코앞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없는 곳이 없다. 선사들은 마음의 눈이 열리면 눈에 가득한 그대로가 불국토라고 말한다. 천태덕소 스님은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니(心外無法), 눈에 가득 온통 푸른 산이네(滿目靑山)” 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촉목보리(觸目菩提: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깨달음)’, ‘촉사이진(觸事而眞: 손에 닿는 것 그대로가 진실)’, ‘도무소부재(道無所不在: 도가 없는 곳이 없다)’라는 말들이 이런 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뜬 만공 스님 역시 ‘불법이 네 눈앞에 있다’고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촉목보리(觸目菩提)의 도리를 깨달으면 사바세계에서도 극락의 삶을 보고 즐길 것이요, 깨닫지 못한다면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으로 평생 캄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만공 스님은 불법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나(我)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일러주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라고 애지중지하며 사랑해 온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과 아상(我相)으로 인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더구나 이 ‘나’에 대한 집착 위에다 ‘너’를 포함한 객관적 사물과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법집(法執)까지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숭산 스님은 ‘보는 자가 여래다(卽見如來)’라는 주제의 법문에서 이런 힌트를 주고 있다.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허한(텅빈) 마음을 유지하면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너와 모든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만물은 언제나 하나이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이다. 설탕을 맛볼 때 설탕과 하나이다. 소가 ‘음메’하고 하면 바로 그 때 소와 하나이다.” <선의 나침반> 숭산 스님은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 ‘나’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면 볼 수 있을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한 생각을 일으켜 자기를 찾으면 곳곳에서 그르칠 것이다”는 고인들의 말이 있다. 보려면 순간에 볼 것이요, 한 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 빗나가고 만다(動念卽乖)는 것이다. 만공 스님 입적 후에 문도회에서 출간한 법어집 제목이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자는 과연 무엇일까?
김성우 객원기자
2007-06-19 오후 4: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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