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74>임종할 때 무심해야
중생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이 움직여서 분별된 알음알이를 일으키니, 중생의 모습을 취하면 범부에, 부처님 경계에 집착하면 성인이라는 분별된 상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의 잘못된 병통으로서 자기 경계에 집착하여 참된 공부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범부의 알음알이를 없애 주려는 방편으로 먼저 성인의 깨달음을 내세우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범부와 성인 이 두 가지 모두는 중생의 분별심일 뿐 ‘그 실체는 공(空)이어서 본디 결정되어 있는 성품은 없다’라는 중도 법문을 설하셨다. 중생의 시비 분별로 이루어진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이 알음알이와 마주보는 성인의 깨달음도 저절로 사라져 일체 분별이 사라진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기 때문이다. 성인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면 아직도 중생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육도에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가귀감> 74장에서 말한다.

凡人 臨命終始 若一毫毛 凡聖情量不盡 思慮未忘 向驢胎馬腹裡托質 泥 湯中煮 乃至 依前再爲 蟻蚊 .
누구이든 임종할 때 털끝만큼이라도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나귀나 말의 뱃속으로 끌려 들어가거나, 지옥의 기름 끓는 가마 속에 처박히기 쉬울 것이며, 개미나 모기 같은 몸을 받게 되기도 할 것이다.

중생의 견해가 범부나 성인이라는 고정된 관념으로 변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지은 업의 그림자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여 범부의 알음알이는 버리고 성인의 깨달음만을 취하려고 한다면 불을 피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다. ‘범부의 알음알이’와 ‘성인의 깨달음’이란 마음으로 분별하여 만든 마주보는 개념으로서 모두 변견(邊見)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변견이란 시비 분별로써 한쪽에 치우쳐 자기주장만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려면 범부의 알음알이에서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을 보고, 마찬가지로 성인의 깨달음도 공성(空性)임을 깨달아, 범부와 성인 양쪽에 대한 집착을 다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모든 집착을 벗어나는 무심중도(無心中道)이다.
이렇게 모든 집착을 벗어나 무심할 수 있다면 저절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게 된다. 경계를 따라 가고 올 것이 없는 본디 성품을 지니게 되어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부처를 보아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이 나타나도 두려운 마음이 없다. 그것은 다 헛된 경계이니 이 경계의 실체는 본래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직 범부의 알음알이가 남아 있어 성인의 깨달음에 집착하게 된다. 결국 경계를 따라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이 잘못으로 육도에 윤회하다 지옥이나 축생의 몸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白雲云 設使一毫毛 凡聖情念淨盡 亦未免入驢胎馬腹中 二見星飛 散入諸趣.
백운(1025~1072) 선사가 말하기를 “한 티끌 남아 있던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아직 나귀나 말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으니, 두 소견이 번뜩이면 육도 윤회에 들어가리라.

두 소견이라 함은 마음속에 주객(主客)이 남아 있는 생각을 말한다. 생각하는 주체인 주(主)와 대상으로서 객(客)인 생각을 내세우는 분별심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한 티끌 남아 있는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깨끗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주객으로 나누어진 두 소견이 번뜩이는 것이다. 이는 아직 미세하고도 미세한 내 생각이 아직 남아 있어 업의 뿌리인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육도에 윤회할 수밖에 없다.
중생이 윤회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 업연(業緣)이 커져 뒷날 얼마든지 나귀나 말의 뱃속으로 들어가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 끝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는 중생의 생사는 세찬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모든 번뇌를 단칼에 끊어 없앨 수 있는 보배로운 부처님의 지혜가 아니면 벗어날 수 없으므로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烈火茫茫 寶劍當門.
세찬 불이 활활 이니
보배 칼이 번쩍인다.

세찬 불이 활활 인다는 것은 번뇌가 끝없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이 번뇌들을 단숨에 끊어 없애자면 공성(空性)임을 아는 보배 칼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가 아니면 안 된다. 그 보배 칼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시비와 분별을 떠나 있는 무심을 말하고, 이 무심이 바로 도에 계합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깨친 사람은 모든 시비와 분별이 사라졌으므로 헛된 생각이 없어 무심하다. 서산 스님은 이 내용을 풀이하여 말한다.

此二節 特開 宗師無心合道門 權遮 敎中念佛求生門. 然 根器不同 志願各異 各各如是 兩不相妨 願諸道者 平常隨分 各自努力 最後刹那 莫生疑悔.
이 두 구절은 수행에 뛰어난 종사(宗師)들이 무심으로 도에 계합하는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특별히 보여줌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에서 염불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염불구생문(念佛求生門)을 방편으로 막아 놓았다. 그러나 공부하는 바탕이 다르고 뜻과 원력이 달라도 저마다 옳은 점이 있어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평소 제 분수에 맞춰 저마다 노력하여 마지막 죽는 순간에 하는 공부에 의심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서산 스님의 이 풀이는 무심한 경계만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중생의 근기에 맞게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중생은 바탕이 다르고 뜻과 원력이 제각기 달라도 저마다 옳은 점이 있으므로 이것만 이해한다면 공부에 조금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연에 따라 염불하여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숨이 끊어질 찰나에도 오직 일념으로 염불을 해야 한다. 숨이 끊어질 마지막 찰나에 참선하던 사람이 참선을 의심하고 염불을 한다거나, 염불하던 사람이 염불을 의심하고 참선 못한 것을 뉘우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공부이든 한번 믿고 시작했다면 결실을 맺을 때까지 밀어붙어야 효험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공부이든 바르게 한번 믿었다면 분별심을 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결실을 얻는 공부, 이것이야말로 무심 도리라고 할 만한 것이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6-18 오후 4:49:35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