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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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밖에서는 내 자성불을 찾을 수가 없어!
어저께도 여러분한테 간단하게 얘기를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물질을 세우고, 내 몸뚱이라고 세우고, 말을 세우고, 이름을 세우고 이러기 때문에 자기 참마음의 전달이 되지 않는 겁니다. 참마음의 전달이 속속히 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이렇게 좋은 법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 좋은 법이 없건만 ‘어쩌면 이렇게 좋은 법을 모를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어저께 잠깐 일체 만물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봤습니다. 모든 무정물이나 생물이나 또는 날짐승들이나 낮은 동물들은 다, 일 년에 지나가는 모든 것을 알고 생활을 하고, 또는 어떠한 무리가 닥쳐오는 것을 알고 지내고 있고, 기상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고, 갖가지로 모두 알고 지내고 있는데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유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제대로 전달을 못하는 원인은, 바로 몸뚱이와 말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착을 떼버리지 못해서 일이 벌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떼버리라고 해서 쉽게 떼버려지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밖에서는 절대로 내 자성불을 찾을 수가 없으며, 자성불을 찾지 못한다면 일체 만물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전달을 못하고 또 일체 만물의 마음을 전달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는 데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괴롭습니까? 한 가정에서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지옥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전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응용하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 내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내 생각만 해서 남 생각을 안 하고 남의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면서 내 생각대로 말을 해버리고 맙니다. 또 내 생각의 차원에 따라서 옳다고 주장하고, 또 내가 아니면 이런 건 못한다고 하는 자만심, 이런 것 때문에 그르치는 겁니다, 모든 게. 벌레 하나도 허투루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운문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어느 날 대중을 모아놓고 “이 세상에 모든 게 왈가왈부하는데” 다시 말하면 ‘광활한데’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깐 복잡다단하다는 얘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종이 울리니 어째서 너희들은 칠조가사를 입느냐고 하셨답니다. 종소리를 듣고 어째 칠조가사를 입느냐는, 뭣 때문에 그 칠조가사를 입느냐 이런 말이죠. 거기에는 참 심중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중들은 제각기 달리 들은 겁니다. 똑같이 들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심중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을 한마디 간단하게 하셨건만 그건 말씀이 아닌 말씀이겠지요.
가사에는 칠조가사, 구조가사, 오조가사가 있는데 최초로 가사를 두를 때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한 폭이면 한 폭, 두 폭이면 두 폭, 한 오락지면 한 오락지 이렇게 시주를 한 거니까, 오조는 조그만 오락지들 모아서 한 거고, 칠 폭을 얻으면 칠조로 하고 또 구 폭을 얻으면 구조로 하고 이렇게 한 걸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심중 깊이 들었겠죠. 우리가 그 뜻을 한번 음미해 본다면 대답을 가벼이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예전에 여러분이 질문을 하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또 대답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듣는 마음이나 대답하는 마음이나, 마음과 마음을 전달을 하는 겁니다. 말로 전달을 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이 된 겁니다. 여러분이 볼 때에 마음 밖에서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거니와 마음 밖에서 나를 어떻게 찾으며, 마음 밖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배짱을 알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수천수만의 조사들의 그 배짱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 말씀 한마디, 의미 깊은 말씀 한마디를 내던졌건만 그것을 모른다면 내 소견만 소견이라고 하지, 남의 소견을 모르니까 그거는 바로 귀머거리와 똑같은 얘기죠.
예전에 내가 이런 말을 했죠? 어느 스님이 탁발을 하러 가서, 보리쌀 뜨물 한 그릇을, 가난한 집에서 바리때에 담아주는 거를 먹고서 너무 가엾어서 나무 한 짐을 해다 주러 갔노라고요. 나무 한 짐을 잔뜩 해가지고 내려오니까 은사 즉, 산 부처가 있다 하는 소리가 “이놈아, 어쩌면 그렇게 좁으냐?” 이거죠. 너는 어째 그렇게 좁으냐? 너의 몸뚱이를 등을 받쳐놓는 등대라 한다면 네 등잔은 마음이니라. 그런데 마음으로 말하면 거기엔 또 기름도 있어야 하고 심지도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심지도 있고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냥으로 불을 당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값에 못 가. 무주상 보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무를 한 짐 해 줘봤자야 한 번 태워버리면 그뿐일 것을, 그렇게 마음이 옹졸해서야 나무 한 짐 한 본의가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작대기로 정강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나뭇짐째 그냥 데굴데굴 굴러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자 거기서 ‘아차!’ 하고선 그 도리를 깨쳤다 합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마디 들으면 가정에서나 도량에서나 자기 범위 내에서 생각을 하고, 자기 차원에서 생각을 하지 남의 차원에서는 좀체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지는 거죠. 내가 좀 더 그 도리를 이해를 하고 그쪽 방면으로 한번 서보는, 잘못됐든지 잘됐든지 내가 서보는 그런 마음이 돼야 하고 그 마음이 됐다면 남들과 서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을 하게 되는 자비심이 생겨서 가정도 조화를 이루고 또 생활 속에서 조화를 이루죠.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부부가 만나서 사는 데도 간단하게 생각이 되지마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다 보면 그것이 너무도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그러고도 생활에 의해서, 자기 인연에 의해서 천차만별로 자기한테 주어진 대로 생활을 하게 돼 있죠. 장사꾼은 장사를 하고 정치인이면 정치를 하고 말입니다, 뭐든지.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내 몸도 복잡다단하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한쪽이 폐허가 되면 또 한쪽이, 즉 말하자면 공장장이 폐업을 하고 파업을 일으킨다면 몸 전체가 기울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도 복잡다단하고 모든 생명들이 내 몸 안에 형성이 돼서 한 사람의 선장으로서 마음을 먹게 돼 있으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다가 가정도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사회도 복잡다단합니다.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과 마음을 전달한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은 우리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부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죠. 여섯 가지가 우리 몸 안에 있는 거를 비유를 한다면 등, 등대, 기름, 심지, 성냥, 사람이 움죽거려야 켭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가 다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너는 그것을 뭣 때문에 먹느냐?’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지금 칠조를 뭣 때문에 입느냐?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너는 뭣 때문에 칠조를 입느냐?’ 이런 것도 ‘밥을 다 해놓고 먹을 걸 차려놓고 너는 뭣 때문에 그걸 먹느냐?’ 이런 거와 똑같은 문제죠. 너는 뭣 때문에 사느냐? 이런 것도 똑같은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마음 하나로 인해서, 이 말은 참 심사숙고하고 들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체가 없으면서 듣고 있고, 나도 체가 없는 마음이 지금 움죽거려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듣는 마음과 하는 마음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마음 안에서 일체 만법의 활용을, 자기의 환경에 따라서 자기 주어진 데에 따라서, 자기 차원에 따라서 말입니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등잔과 등대가 있는 게 아니고 코드만 가지면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이렇게 발전이 됐다는 얘깁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여섯 가지 방편을 썼지마는 지금은 여섯 가지가 한 가지가 될 수 있고 한 가지가 여섯 가지가 될 수가 있는 거죠. 여섯 가지만 여섯 가지라고 볼 수 없는 거죠. 한생각에, 코드 하나에 끼웠다 뺐다 할 수만 있다면 안에서 끼고 바깥에서 끼고 할 수 있다면, 안에서 끼면 바깥에서 벌써 환하게 비치는 거 아닙니까? 가설은 본래 돼 있는 거고. 우리 인간이 살아 있다 하면 벌써 이 세상 가설은 다 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대로 마음과 마음을 전달해서 즉, 끊임없는 예부터 지금 여기 나오기까지, 마음을 전달해서 이날까지 나온 것이지 마음을 전달해서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예부터’ 하는 소리는 억겁을 거슬러 올라가서 얘긴데, 그때서부터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마음을 계발하고 마음의 계발이 됨으로써 진화가 되고, 진화가 됨으로써 몸이 바꿔지고 바꿔짐으로써 옮겨놓고, 옮겨놓음으로써 우리는 예까지 온 것인데, 지금 옮겨진 몸만 몸인 줄 알고 있죠. 어저께 굼벵인 줄 모르고 오늘 매미인 줄만 아는 그러한 속 좁은 마음이죠.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한데 뭉쳐서, 일심(一心)도 고정된 게 없다는 걸 알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생수 맛을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자에는 전자대로 끊어지지 않고 예부터 오는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이 마음을 ‘예부터’ 했단 말입니다. 옛 자리나 지금 자리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돼가지고 일체 만물의 선장인 부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왜 그렇게 폭이 넓지 못하고, 팔이 넓지 못하고 마음이 넓지 못해서 우주의 근본과 일체 만물의 근본을 한마음에 넣고 굴리지 못합니까? 물론 새들도 재잘거리고 입으로만 말을 하지, 도대체 마음으로 말을 하지를 않아요. 그 말소리를 들을 수는 있죠. 그러나 듣는 것도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은, 다섯 가지 오신통(五神通)이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은, 듣고 보고 해도 내가 이것을 옮겨놓을 줄 모르고 자유자재 못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보기만 하면 뭘 하고 듣기만 하면 뭘 합니까?
만약에 백 명이든 십만 명이든 딱 마주쳤을 때, 즉 말하자면 내 앞에 딱 다가왔을 때는 내가 급하니까 그것을 옮겨놓을 수밖에는 없는 거, 즉 말하자면 어떠한 폭풍이 왔을 때 ‘폭풍을 이쪽으로 조금 옮겨놓고 분배를 하면 여기도 무너지지 않고, 저기도 무너지지 않을 것을….’ 할 때, 이것은 자기 자성의 근본적인 자비요, 바로 자비의 원력입니다. 무너지면 살려고 하기 이전에 내 몸뚱이도 그 몸뚱이도 모두가 다 중생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내 한마음이 그렇게 넓은 자비 원력이 있다면 폭풍이 올 것을 흩어지게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면 수백 명에 달하는 인명이 죽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은 무너지는 걸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만이 도가 아니지 않느냐? 그게 용이 아니지 않느냐? 이런 것도 있는데 이게 바로 잘못됐다 이겁니다. 잘못들 생각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건 왜? 가는 것 잡지 말고 오는 것 막지 말라 그랬습니다. 가정에서 살면서도 내 앞에 닥치는 거 남 일 보듯 그냥 돌아설 겁니까? 닥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스스로 나는 겁니다. ‘야, 이거 참 저녁거리가 없는데.’ 이런 생각은 스스로 나는 거 아닙니까? 누가 하라 해서 하고 말라 해서 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나기 때문에 그걸 마다하지 않고 피해서 달아나가지 않습니다. 가정이 다 굶어죽어도 내가 귀찮다고 ‘에잇, 나나 먹으면 됐지.’ 그러고 그냥 달아나가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마음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문제를 놓고 볼 때 날아다니는 새도, ‘음매 음매’ 하고 우는 소도 심중 깊이 마음으로서 말을 했다면 그건 말이 아닌 마음입니다. 마음을 전달한 겁니다. 아마 운문 스님도 마음을 전달해서 말을 했는데 하나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무효가 되는 거죠. 그걸 한 사람이라도 들었다면 정말이지 이것은 마음을 전달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의 보배를, 우리가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나를 세우지 말고 남의 참견 하지 말고 주변에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남을 탓을 하지 말고. ‘남이 이렇게 해서 이렇다.’ 이러지 마세요. 남의 탓이 절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놨을 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놨을 때는 스스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스스로 돌아갑니다. 완화되고 그것이 아주 스무드하게 돌아가는데, 말로 이게 틀리다 저게 틀리다, 이 사람이 틀리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이런다면 공부하는 거는 틀려버렸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만 벌어져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심중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러한 관습적인 습을 몽땅 떼야 되겠습니다.
한 가지 끝으로 얘기해드릴 것은 우리는 지금 마음의 근본을 가지고 있으니 주변을 둘로 보지도 마시고, 원망하지도 마시고 모든 것을 나로 보세요.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거는 깨달은 대로의 법이 될 수 있는데 이런 게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자비다, 이런 거 말입니다. 왜? 그건 무명을 치고 옷만 벗겼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욕이 아니라 자비가 될 수도 있거든요. 답답하면 욕을 한마디 해놓고선 그 사람 마음의 근본을 건지려고 무척 애를 쓰는 그런 자비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그런데 남의 속을 하나도 모르면서 자기 생각대로 막 해버리는 그런 습이, 여러분이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때는 그 습관이 나온다고 봅니다. 다른 때는 아무 일도 없다가도 급작스럽게 닥쳤을 때 그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닥칠 때에 한번 찔러보면 영락없이 예전의 습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나 좋은 법이 돼서 한번, 어저께도 조금 얘기를 했지만 우리가 일체 만법에 의해서 마음의 보배가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코드라면 큰 거를 쓰려면 큰 코드 하나에, 마음을 먹을 때 ‘나는 모터를 돌리겠다’ 하고 코드를 꽂으면 모터가 돌아지고, ‘난 냄비에 찌개를 끓이겠다’ 하고 코드를 꽂으면 찌개가 끓여지는 것이 바로 보배입니다. 이 세상에 우주의 섭리나 이 세계의 섭리나 나라의 섭리나 가정의 섭리나 복잡한 몸의 섭리나 모두 똑같이 행할 수 있는 그 자력이 여러분한테 다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로 여여하니 부처니라’ 하는 말을 한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색에 끄달리지, 욕심에 끄달리지, 말에 끄달리지, 나에 끄달리지 모두 끄달리다 보니깐 아예 그냥 철통같이 막힌 겁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항상 마음에 의해서 용을 하고 있으면서도 용을 먼저 하는 것은 사법이고 정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이든 사법이든 어떤 거를 막론하고 다 놔버려야 됩니다. 놔버리고서 자기가 한생각을, 한생각을 하기 이전에 그냥 무심히 생각하면서 무심히 밥 먹고 똥 누고 잠자고 편리하게 살아나가듯이 큰일이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스스로의 자기 한생각에 좋게 돌아올 수 있는, 좋게 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저 오다 가다가도 한생각 좋게 탁 내던질 때도 있고, 오다 가다가도 한생각을 좋게 내주기 위해서 한번 찔러볼 수도 있고, 오다 가다가도 한번 말을 푹 찔러서 남의 부아를 훌렁 뒤집어놨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이 어땠을까, 하는 것도 한 번 해봄으로써 거기에선 한마음의 도리에 큰 공덕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에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면서도 속이 뒤집어지게 남한테 말을 해주는 거는 그것도 자비다 이겁니다. 그 왜? 모르는 사람이 뒤집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악으로 돌아가지만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 속을 뒤집어놓는 거는 그건, 즉 말하자면 그 사람의 뜻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건 자비입니다.
누가 나에게 “저 사람은 이렇게도 굴러가고 저렇게도 굴러가고 두루뭉수리 같아. 뭐 끊고 맺는 게 없어.” 이러고 욕을 한다 해도 나는 그걸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고 또는 저 사람은 못났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수시로 이런 말 하죠. 부처님의 뜻이란 개를 건지려면 개가 되고, 벌레를 건지려면 벌레로 들어가야 하고, 부처 자리에 같이 앉아있으려면 부처 자리에 같이 하고, 보살이 되려면 한 발, 한 계단 내려딛고서 보살이 돼야 하고, 여러분 집에 가려면 여러분이 나하고 동등해야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뭣이 잘나고 뭣이 부처고 뭣이 중생이고 그런 거 다 모릅니다.
엊그저께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미국에서 어떤 아이가 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정신이 이상해져서 학교를 다니다가 휴학을 했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고요. 그 최씨는 미국에서 살면서도 항상 편지를 하면서 자기네 가정을 지켜나가고 공부를 해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모든 데에 끄달리지 않고 세상의 일체 만법을 마음대로 응용할 수 있는 보배가 바로 각자에게 있다는 걸 실감하고 알 때 비로소 “그거, 그래요!”, “그래요” 하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거기 갈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전달해서 거기 받는 사람,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이쪽에서 대답하는 사람이 벌써 동일해지는 겁니다. 그럼 내가 걱정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걸 위해서 안달복달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순간 찰나 아닙니까?
그런데 3일 만에 300불을 보내면서 하는 소리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거를 열다섯 개를 그려놨어요. 그건 왜 그랬느냐? 그리고 그림 위에다가 한마디 ‘버리게 된 자식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써 놨어요. 그럼 도대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뭡니까?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는다 하는 것이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법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실감하지 못하고 그저 남 탓을 하느라고 볼 일 못 보는 거야. ‘공부했다는 사람이 용으로 들어가? 공부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해?’ 하고 말입니다. 도대체 남의 탓을 해서 뭘 합니까? 남이 이렇게 가든지 저렇게 가든지 무슨 상관 있습니까?
천칠백 공안이 다 문이야. 문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문이 그렇게 많아요. 근데 목적지는 한 목적지인데도 문이 그렇게 많으니 자기 차원대로 다 가는 거라! 주판을 놓을 때 십 원을 놓고 만 원 놓는 걸 알았든지, 만 원 놓고 만 원 놓는 걸 알았든지, 백 원을 놓고 만 원 놓는 걸 알았든지 십억 놓는 걸 알았든지, 그건 상관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냥 살아가면서 지금 용을 하는 것이, 그대로 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용이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고, 불법이 따로 있고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깨우침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대로 지금 ‘깨우침 법’ 하는 것은 안으로 굴려서 언제나 무겁게 원자력 능력을 닥치는 대로 받아서 쓰는 것뿐이지, 우정 찾지 않는 것을 일부러 말을 해가지고 내가 이렇게 잘 아니까 너를 도와주겠다 이런 말은 언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거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 탓 안 한다. 남을 원망 안 한다. 남을 증오 안 한다. 남의 말에 끄달려서 돌아가지 않는다. 남의 참견을 안 한다.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 참견을 안 하되 참견을 할 수 있는 거는, 내 앞에 닥친 참견은 해야지요. 이 도량에서도 만약에 뭐가 잘못 돌아간다 이럴 때는 자기 생각에, 주인공에 맡겨놓고 돌아가게 해야지, 이걸 말로 발설을 하고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이 어떻고 이런다면 일이 하나도 해결이 안돼요. 오히려 바깥으로 더 커지죠. 이런 건 다 놔버리고 자기한테만 오로지, 자기 주인공한테만 맡겨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걸 봤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눈에 거슬린 거지 내가 없이 어떻게 거슬립니까?
그런 거를 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끝없는 예부터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습을 녹일 수 있으며, 어떻게 내가 그것을 항복을 받을 수 있으며, 또 항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항복을 받고 내가 항복을 하는 건데, 항복을 받는 사람도 나요 항복을 하는 사람도 나다 이겁니다. 육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구족(具足)하다’는 그런 말이 있듯이 그대로 산 부처다 하는 겁니다. 산 보살이다, 산 법신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이게 정법이다, 사법이다 하기 이전에 그걸 다 놔버리고, 못났든 잘났든 문이 아니든 문이든 한번 엎드러져보고 돌아가는 거지, 이것이 큰 경험이며 보배를 크게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남의 말로 ‘팔만대장경에 이렇게 해놨으니까 요렇게만 가야겠다.’ 이건 모두가 착이야.
예전엔 그렇게 등대가 있고 등잔이 있고, 기름이 있고 심지가 있고 성냥이 있고 손이 있어야 했어.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손도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손이 들어지지 억지로 들어지나요? 그리고 또 우리가 책을 본다 하는 것도 ‘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담습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예전에는요, 글자를 쓸 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 거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글을 씁니까? 그래서 글을 보지 말고 그 글 속의 백지의 마음을 봐라 이겁니다, 응? 글씨가 나를 보고 내가 글씨를 보지 말라 이겁니다. 그 글씨 속에 있는 거를, 우리는 그대로 글씨 써놓은 대로 이름을 가지고 상징하지 말고 그 속에는 뭐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아까 운문 스님이 말씀하신 그 뜻도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닥치는 대로 스스로 코드를 꽂고 스스로 코드를 빼고, 우주법계에 스스로 천체 통신력으로 이행해주고, 그대로 통신이 되면 가차 없이 그대로 정돈해주고 책정해주고 이렇게 하는 이 도리를 우리는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스님은 설법한다고 하면서 그저 부처님의 좋은 말씀은 안 해주시고 만날 저렇게 쓸데없는 말만 한다고 하지 마시고, 쓸데없는 데서 지금 쓸데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걸 아십시오. 그리고 사람이 준비를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죽으면 혼이 얼마 동안 있다가 윤회한다고 하지마는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 그저 몸 떨어지자마자 다시 새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내 몸 없이도 수만 개가 바로 내 몸이 아님이 없고, 몸 하나가 수만 개의 내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미국에서 전화가 오고, 여기서도 여러분이 해결할 것이 있고 그러는데, 그럼 그 마음이 체가 있어서 어떠한 한계가 있다면 모르지만 체가 없기 때문에 한생각 내면 그냥 그게 내가 내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어떠한 병에 걸리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이 도리를 이렇게라도 알아서 커버해주는 사람은 쉽습니다. 병이 아무리 위독하다 할지라도 옆에서 아는 사람이 커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쉽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붙들고 애를 쓰면 그만치 더딥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하는 거죠.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묘법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에 조금도 애착이 없이 남의 걱정 하기 이전에 나부터 아시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남의 걱정이 있걸랑은 내 마음에다가 맡겨놓으시라는 얘기지 걱정 안 하라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하고 진짜로 자비한 마음이 있걸랑은 안에다가 굴려놓으십시오. 거기에 맡겨놓으신다면 오히려 내가 뛰어다니면서 일을 해주는 것보다 백곱쟁이 천곱쟁이 아마 좋은 결과를, 씨를 거둘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면서도 좀 더 사는 데에 괴로움이 없이 사시라고 이러는 겁니다.
여러분을 보면서 저는 때로는 가다가도 눈물이 나고 오다가도 눈물이 나는데 못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마 마음에서 말입니다, 남은 이 소리를 했는데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눈물이 날 때가 있거든요. 그 뜻을 보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서 왔다고 그러는데 그 아버지가 울고 있어요. 아버지가 울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 그 생명이 앗아졌는가를 볼 때 너무도 무참해서 그 사람은 비켜놓고 그 아버지하고, 아버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동일하게 돼가지고 눈물이 흐르는 거 있죠. 그럴 때가 있습니다. 조실부모한 사람들도 많은데, 조실부모했다 하면 고통이 조금 많은 것 같아요, 가만히 볼 때요.
그러니 모든 게 우리 그 마음들은 변치 않고 있으나, 그분이 바로 여러분이거든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몸이 없어지면 바로 자식이 그분이지 즉, 과거 그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연방 마음을 전달해서 나오고 생기고 이렇게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이 인생살이가 다 엊그저께가 따로 없고 내일이 따로 없고 오늘이 따로 없는 겁니다. 오늘은 이걸로서 마치겠습니다. 86년 6월 15일
2007-06-12 오전 11: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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