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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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성문과 보살
수행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깊은 산속에서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연상한다. 번잡한 세상을 떠나 숲 속에 홀로 앉아 한가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공부하는 수행자의 생활은 생각만 해도 아름답다. 그러나 ‘산속에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라는 틀을 만들어 그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라 할 수 없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닦고 있다고는 하지만 고요한 마음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의 또 다른 시비분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모르고 부처님의 말씀만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을 성문이라 부른다. 얼핏 보면 고귀한 수행자인 듯 하나 불법을 모르기에 수행에 진전이 없다. <선가귀감> 72장에서 말한다.
聲聞 宴坐林中 被魔王捉 菩薩 遊戱世間 外魔不覓.
숲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성문은 마왕에게 붙잡히고, 세간에 노니는 보살은 외도나 마군이 보지를 못한다.
‘연좌(宴坐)’는 끄달림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이니,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안정된 마음으로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성문은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한 곳에서 홀로 앉아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한 경계에만 집착하는 한, 이 집착은 중생의 또 다른 시비분별이므로 이 시비분별이야말로 중생을 번거롭게 만드는 마왕이 된다. 숲 속에서 고요히 앉아 공부하는 것을 전부로 알고 그것을 즐기고 있던 사리불에게, 유마 거사는 이것은 잘못된 수행이라고 지적하며 <유마경>에서 말한다.
“사리불이시여,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이 끄달림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연좌(宴坐)’가 아닙니다. ‘연좌’란 무엇이겠습니까? 생사를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라도 경계에 집착하여 몸이나 마음의 흔들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편안한 ‘연좌’가 되는 것입니다. 생멸하는 것이 아닌 늘 여여하고 고요한 선정 속에서 모든 위의를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버리지 않고서도 세속적인 범부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으로 갇히어 정적에 잠기는 것도 아니고 밖을 향하여 어지러워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삿된 견해에 흔들리지 않고 온갖 수행을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번뇌를 끊어내지 않고서도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편안한 ‘연좌’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올바른 좌선을 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도 그 공부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舍利弗 不必是坐 爲宴坐也 夫宴坐者 不於三界 現身意 是爲宴坐 不起滅定 而現諸威儀 是爲宴坐 不捨道法 而現凡夫事 是爲宴坐 心不住內 亦不在外 是爲宴坐 於諸見不動 而修行三十七道品 是爲宴坐 不斷煩惱 而入涅槃 是爲宴坐 若能如是坐者 佛所印可]”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고 모든 집착을 떠나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수행자를 우리는 보살이라 부른다. 보살은 범어인 보리살타(菩提薩陀)를 줄인 말이다. 뜻으로 번역하면 ‘각유정(覺有情)’이라고 한다. ‘보리’는 ‘각(覺)’의 뜻이 있고 ‘살타’는 ‘유정(有情)’ 곧 중생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위로는 지혜로써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 밑으로는 자비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실천한다. 지혜를 기르는 자리행(自利行)과 자비심을 기르는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오롯하게 실천하여 그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 불과(佛果)를 성취하니, 보살은 가만히 앉아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용맹스럽게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자신의 공부를 이루기 위해 세상의 삶과 떨어져 사는 성문과 연각의 경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요한 산속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세간에 노닐면서도 지혜를 닦고 자비를 실천하며 수행하는 사람이다.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은 있을 수 없으며 깨달음의 성취도 바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원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환상도 허구도 아니다.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삶 속에 내재하고 있는 현실의 향기이며 여운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聲聞 取靜爲行故 心動 心動則 鬼見也. 菩薩 性自空寂故 無迹 無迹則 外魔不見. 此合論二乘菩薩.
성문은 고요한 경계를 취하여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을 수행으로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니, 마음이 움직이면 귀신이 보게 된다. 보살은 그 성품이 본디 비어서 고요하므로 그 마음에 자취가 없으니, 자취가 없다면 외도와 마군들도 볼 수 없다. 여기서는 이승과 보살을 함께 말해 놓았다.
고요한 경계를 취한다는 것은 아직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니 경계가 남아 있어 시비분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갈등이 없을 수 없으니 그 틈을 타 귀신에게 홀리기 쉽다. 그러나 대승 보살은 그 성품이 본디 비어서 고요하므로 움직일 마음이 없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시비분별 하는 마음의 자취가 있을 수 없다. 자취가 없으니 외도와 마군들이 찾을 수 없고, 그러므로 마구니에게 홀릴 일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나 무심해져야 진짜 보살이요 참된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육조 스님이 <육조단경>에서 말한다.
“선지식들이여, 도란 모름지기 막힘없이 흘러가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막히게 되는가? 마음이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도는 막힘없이 흘러간다. 마음이 법에 머무르면 이를 일러 스스로 법에 묶인 것이라고 한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은 공부라고 주장하면, 이는 숲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공부로 알고 즐기던 사리불이 유마 거사의 호된 꾸짖음을 받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선지식들이여, 어떤 사람은 앉아서 마음의 고요를 보되 일어나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그것으로 공부를 삼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몰라서 말에 집착하여 잘못된 생각을 낸다.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큰 잘못인줄 알아야 한다.[善知識 道須流通 何以却滯. 心不住法 道卽通流 心若住法 名爲自縛. 若言 坐不動是 只如舍利弗 宴坐林中 却被維摩詰訶 善知識 又有人敎坐 看心觀靜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不會 便執成顚 如此者衆. 如是相敎 故知大錯]”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
산들 바람 꽃길에서 오락가락 노니는데 어느 집은 빗속에서 문을 닫고 근심걱정.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6-05 오전 9: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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