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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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있기에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겁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요
마음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가다 보면 이 공부를 내가 어떻게 만났는데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거 힘이 미약해서 도대체 공부가 안되는 건가 싶어서 스스로 판단을 잘못 내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추스려서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안 되죠.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공부를 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지금 살고 있는 이 생활이 즉, 교재고 공부입니다, 인생 공부. 여기서 이런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댁은 살아나가면서 다 겪어야 하고 그런데 뭐하러 ‘내가 다 하고 있는가 안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는가.’ 이런 걸 걱정을 합니까? 사실상 나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그게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있는 건데 내가 공부가 되는가 안되는가 하는 거는 그걸 못 믿기 때문이거든요.
꽃나무가 만약에 자기 뿌리를 못 믿어서 ‘내가 지금 꽃이 피고 있는가, 안 피고 있는가?’ 이런다면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나무들이 ‘아, 내가 지금 열매를 맺을까? 꽃은 피었는데 열매를 맺을까, 못 맺을까?’ 이런다면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냥 뿌리가 있기 때문에 싹이 있으니 그대로, 그대로 여여하게 살고 열매도 맺고 꽃도 피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뭘 그거를 내가 공부가 잘되는가 안되는가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건 못 믿으니까 그런 겁니다. ‘내가 완벽하게 내 뿌리가 있다는 것만 믿는다면 그 싹은 거기에 의지하고 전체가 거기에 의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환자들에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할지
저는 불자들이 모인 자원봉사 단체에 소속돼 있습니다. 국군병원이라든지 또는 시립병원, 행려병동에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외면받고 있는 소외된 환자들을 위문도 하고 간병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많이 동참을 해서 희망을 주고 있는데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불자로서 어떻게 마음을 내고 위안을 해 줘야 올바른 것인지 명쾌하게 답을 얻지 못해서 스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옵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게끔만 해 준다면, 이리로 동그라져도 주처가 거기 있고 저리로 동그라져도 주처가 거기 있기 때문에 도움을 그대로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런다면 나는 항상 중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바깥으로 찾는다면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허영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부터 생긴 게 아니라 속에 종자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불성 종자가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靈)의 종자는 바로 영혼을 다스릴 수 있는 주장자라야 되겠죠.
얼른 쉽게 말해서, 나로부터 주처가 있고 나로부터 이 몸뚱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거죠. 그거를 알게 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전체가, 우주 전체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게 하나님으로 이름이 돼 버리고 자기 인식들이 그렇게 돼 버리고 그러니까 자기가 항상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수레가 아니라면 살 수가 없이 된 이 상황 속에서, 이 수레바퀴를 벗어나서, 이 공기주머니를 벗어나서 공기가 없어도 우리가 모든 거를 다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는 데에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위축시켜서 생각을 그렇게 하니 ‘너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항상 중생으로만 살아라, 거지로만 살아라.’ 이러는 거와 뭐가 다릅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라 한 게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살아라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타인을 믿는다면 모두 마구니의 장난과 같으니라.’ 했거든요. 그랬는데 나를 믿어야 한다고 하는 소리에 그만 거기에서 딱 막혀 버린 거죠. 그래서 예수님만 딱 믿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각자라고 그랬거든요. ‘각자 너를 믿지 않는다면, 타의에서 구한다면 그건 도깨비장난과 같으니라. 못났든 잘났든 너로부터 이 세상이 있는 거지 너를 빼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주처의 자기 주인공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기도를 하거든요. 바깥으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찾는데 그건 이 진리의 이름만을 찾는 거와 똑같습니다. 내가 그전에도 외국에 나가서 그랬죠. ‘불(佛)’은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을 말한다. ‘교(敎)’는 일체 만물만생의 생활이다. 일체 만물만생이 생활을 해 나가는 거를 ‘교’라 그런다. 모든 생활에서 배우고 느끼고 지혜가 넓어지고 또 연구를 하고 창조가 되고 이렇게 해 나가는 이 자체가 바로 ‘교’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 불교라고 하는 언어는 진리를 말하는 거지 머리 깎은 사람이나 믿는 것으로 국한돼 있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죠. 지금 수녀들이 머리에 쓰고 하는 거나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하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만 이 세상 삼라만상이 천차만별로 그 수레바퀴에 끄달리고, 그냥 천차만별의 가닥가닥, 갈래갈래로 모습이 돼 있고 그러니 이것을 사람의 머리로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무명초는 가차없이 잘라 버려라, 나오는 대로 잘라 버려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머리를 나오는 대로 깎아 버리는 거 아닙니까?
원효 대사가 설총이 쓰레질을 해 놓은 걸 보니 말갛게 쓸어 놨거든요. 쓸어서 무더기를 지워 놓았는데 가서 한 움큼을 집어서 다시 뿌려 놨어요. 이건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저 아래서 여기까지 오면서 발 떼어 놓고 들어오는 격이란 말입니다. 한 발 떼어 놓으면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없어지는데 한 발 떼어 놓는 게 없다면 그냥 다 무효죠. 그러니까 역시 떨어지면 또 쓸어야 하고 떨어지면 또 쓸어야 하는 것이 이 진리에 관한 건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네들한테 이익하게 하려면 무조건 당신 마음에 주처가 있는 거니까 밖에서, 먼 데서 주님을 찾지 말라고 일러 주는 거죠. 당신을 벗어나서 주님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있기 때문에 당신 깊은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다고요. 또 불자들한테 이익 되고 공덕이 되게 하려면, 마음이 합쳐져야 공덕이니까 한마음으로 한 공덕이 돼야 되는 것이라고 하죠. 여러 마음들이 한데 합쳐져서 일을 해 주니까 공덕이죠. 그러나 한마음으로 할 수가 없다면 공덕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둘 아니게 돌아가야 한다. 전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 마음이 50%가 있다면 보이는 사람의 마음이 50%가 있다. 보이지 않는 몸이 50%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영체가 50%다.’ 하는 것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산 사람이 반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물체가 또 반이 있죠. 밤낮이 이렇게 돌아가듯, 살고 죽는 것도 그렇게 돌아가듯, 그러니까 불자에게는 당신 자부처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마음 안에, 그 숱한 보살의 이름이 다 거기에 있다고, 당신네 아픈 걸로 비유한다면 그 약사보살은 바로 당신한테 있다고, 그 자부처의 마음에서 약사보살이 나온다고 그렇게 일러 주세요. 그렇게만 일러 주고 그렇게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무진장 도움을 받게 될 겁니다.

천도가 왜 생겼는지?
불가에서의 천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그리고 천도가 생긴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머니께서 자꾸 꿈에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보이고 몸이 불편하시다고 해서요.
천도가 왜 생겼느냐. 정신계의 도리를 모르고 돌아가신 분들은 의식이, 항상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친척 집을 맴돌거나 자기 집에서 떠나지 못하고 묘지에서도 떠나지 못합니다.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고 나서 잔뜩 들어 있던 업식이 그림자처럼 나타나니까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업식 소굴에서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 몸뚱이 속에 업식, 의식, 모습들이 수없이 있습니다. 좀 들여다보십시오. 모습들이 얼마나 천차만별로 돼 있나. 보지 않고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 모습들이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작용들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잘못 작용을 해 가지고 파워를 일으키고 해서 자기 집을 망가뜨리고 있는 사람도 있죠.
그렇듯이 온통 자기가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고, 강을 건너가려야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가고 불바퀴를 넘어서려야 타 죽을까 봐 못 가고 이러니까 오백 년이 돼도 천 년이 돼도 물가에서 뱅뱅 돌면서 한 치도 건너갈 수 없죠. 이러니 자손들이 부모를 위해서 천도를 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병이나 낫겠다고, 또는 자기가 잘되려고 천도재를 한다면 아니 됩니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서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해 드린다면 자손들은 더불어 벗어나게 될 것이 아닙니까? 한 염주 알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시잠깐만 생각하고 내 발등에 불 떨어진 것만 급하게 생각하고 온통 야단법석들을 하는 겁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느 대장장이가 대대로 내려오면서 대장간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새벽같이 일어나서 풀무질을 해서 불을 피워야 뭐라도 만들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모두 살아 계시고 그러니까 “아이구! 묵은 빚 갚으랴 자식들은 옹기종기 있으니까 햇빛 주랴, 이거 참 정말 이 세상 살기가 너무나 어렵구나!” 하고선 한숨을 훅 내쉬고선 손을 혹혹 불면서 불을 피우느라고 풀무질을 하는데 임금이 순회하시다가 담 밑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그런데 ‘묵은 빚을 갚으랴 햇빛을 주랴.’ 이 문제를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해가 되지를 않아요.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튿날 신하를 시켜서 그 사람을 불러오게 했어요. 불러와서 “새벽에 불을 피우면서 한 소리가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어요. 그래서 “부모님도 살아 계시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살아 계시고 한데,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또 그분들이 낳아서 길러 주셨으니 그 은혜를 생각해 보면 제가 죽도록 갚아도 못 갚을 묵은 빚입니다. 그래서 ‘묵은 빚을 갚으랴 햇빛을 주랴, 이거 참 살기가 어렵구나!’ 했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그 상놈의 풀무쟁이 신분을 싹 치워 주더랍니다. “세상에 이런 효자가 어디 있느냐!” 하고요. 그래서 논농사 짓게끔 논마지기를 떼어 줘서 평민으로 살게 했더랍니다. 그것도 한생각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도 한생각이에요. 그걸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은혜롭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거죠.
인간의 몸뚱이가 천년만년 사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몸뚱이가 한 철 나러 나온 겁니다, 한 철! 그 한 철 날 동안에 이 도리를 아셔야 될 것입니다.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아무렇게나 염불이나 하고 목탁이나 친다고 해서 천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걸 똑바로 아셔야 됩니다. 형상의 부처님과 형상인 자기가 둘이 아닌 줄 아는 스님이라야 목탁을 한 번만 쳐도 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 따로 있고 스님 따로 있고 중생 따로 있고 이런다면 목탁을 천만 번을 쳐도 천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無)의 세계의 뜻을 알려면…
이 세상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보이는 세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뜻에 의해서 보이는 세계가 영향을 받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무(無)의 세계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연화장불(蓮華藏佛)’이러면 아주 최고의 한울을 꿰들어서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주인이라는 뜻도 되죠.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 은하계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은하계에 또 더 큰 은하계도 있고 또 더 큰 은하계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소속된 은하계는 얼마나 많겠습니까만 은하계 속에 있는 우리 생명력들은 사분파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질척한 데서 사는 거나 물에서 사는 거를 한 부분으로 치고, 또 나무들 풀들을 한 부분으로 치고, 날아다니는 거 또 땅을 딛고 다니는 거, 이렇게 네 분류 속에서 알로 낳는 거, 태로 낳는 거, 질척한 데서 낳는 거, 화(化)해서 낳는 네 가지가 소속돼 있습니다.
그 소속되어 있는 생명이 한데 합쳐진 마음, 즉 공존하는 그 주장자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이름해서 사왕천(四王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걸 이름을 지어서 이름이지, 총 합해서 지도를 하는 자가 사왕천이라고 이름해서 붙인 겁니다. 이름해서 붙였다고 그것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오갈 수 있고 광력이나, 전력, 자력, 여러 가지 힘이 서로 서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사왕천에서도 벗어난다면 원심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원심력을 얻는다면 그 원심력은 어떻게 해서 원심력이 될까? 그리고 사무사유(四無四有)라는 그 뜻은 뭐냐? 죽은 사람들의 마음, 산 사람들의 마음이 둘이 아닌 그런 뜻을 가지고 사무사유 한데 합쳐서, 즉 말하자면 우리가 한마음의 지도자가 된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우리가 무(無)의 세계의 그 모든 것들을 살펴보면, 천차만별로 돼 있는 영령들, 그 처절한 영령의 참혹한 일들, 이름 해서 부를 수 없는 일들, 또 산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참혹하고 처절한 영령들, 즉 산 사람한테 악이면 악, 선이면 선 그렇게 침입을 해서 인연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한다는 뜻이 거기에 있고, 팔자 운명이라는 것도 거기에서 이름이 속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팔자 속 운명 속 업보 속에서 어떻게 벗어나야만이 사왕천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왕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을 얻는 것은 악이나 선이나 다 놓는 것뿐인데 여러분은 “나는 놓을 수 없다.” “어렵다.” 이럽니다. 그러면 ‘왜 어려우냐?’고 나는 그러죠. 그게 아주 아리송하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렵다고들 그러지만 나는 하나도 어려운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유스럽습니다. 지금도 자유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제재를 받는 게 아닙니다. 용도에 따라서 자기가 스스로 가고 오고,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만나고, 스스로 교차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고, 여러분 자유자재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모든 것이 바로 내 근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전부 여러분의 한마음이 근본으로 돌아가면서 그것이, 즉 말하자면 오고 감이 없는 빛보다 더 빠른 누진통(漏盡通)으로 인해서 천체무전통신기처럼 광력이나 전력에 종합된 그 에너지가 바로 저 은하계로 통하게 됩니다. 은하계의 별들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본이 바로 직속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無)의 세계의 한마음의 뜻을 알려면 내 안테나를 세우지 않고는 상봉할 수가 없는 거죠. 나의 안테나는 근본의 전체 통신을 할 수 있고 천체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거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심안이 밝아진다는 뜻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오고 감도 없는 육신통, 이것이 천백(千百)으로 화(化)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느냐? 여러분이 의심하지 말아야 된다 이겁니다. 자기를 자기가 의심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구, 내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이거를 해서는 안 되는데….’ 하고 꼭 후회가 들어가고 반성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데는, 정말 나를 깨닫는 그 길을 택하려면 후회도 반성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없는 거다’ 하고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내 마음 근본 주인공 속에 다 같이 있기 때문에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즉 직속으로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모두 각각 논다면 이거는 정말이지 여러분은 자기 몸 하나 추스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거를 했든지 뒤돌아보지 마세요. 잘못됐어도 그것은 잘못되게 한 장본인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다 되놓는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정돈되는 거죠. 그러니까 빨리빨리 파악을 해야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 생활하는 모든 것이 그냥 참 행이요, 그것이 참선이요, 행선(行禪)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왜 잘 써야 하느냐? 여러분이 한 번 잘못 쓰면 이 몸뚱이 속에 업식으로 뭉쳐집니다. 저지른 대로 업식이 돼서 내 몸뚱이에 뭉쳐 있으니 거기에 속지 말고, 잘못되는 것도 업식으로 뭉쳐져 있는 인과로 인해서 나오는 거니까 모든 걸 놔라, 맡겨 놔라.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녹일 수밖엔 없다. 거기서 해결할 수밖에는 없거든. 어떤 때 보면 여러분이 재밌게 밥도 먹고 과일도 먹고 있는데 시커먼 게 거기들 죽 앉아 있어도 여러분은 눈이 멀어서 못 봐. 잠시 잠깐 웃고 즐길 거라면 그게 뭡니까? 그게 사는 겁니까?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에 그 업식으로 인해서, 업식을 가지고서 여러분한테 찰나찰나 닥치는 겁니다.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바깥에서 오는 거, 안에서 오는 것들이 여러분한테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 이 마음을 잘 쓰고 사셔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여러분 내면에 생명체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데 그 가득 차 있는 생명체들이, 의식들이 누구인 것입니까? 한 부분만 파워가 일어나도 지금 그 집합소는 무너져요. 이게 집합소거든요, 나의 집합소! 그리고 내가 나를 다스려서 이끌어 가는 선장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이 몸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과거로부터 생긴 건데 그 업식들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번뇌다. 의식들이 모두 마구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게 못 되지요. 그 악업 선업의 업식들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이 정자 난자를 빌려서 이 세상에 출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빠도 나쁘다고 할 수가 없고 좋아도 좋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진리죠. 알고 보면 그렇게 묘한 법입니다. 나쁜 것을 습관적으로 나쁘다고만 하지 않는 것이 넓은 마음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똑같은 기복이 아닌지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는 거나 법당에서 부처와 보살에게 정성을 들여서 복을 바라는 거나 똑같은 기복이 아닌지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요?
아주 간편하게 나무로 비유를 하죠. 나무들을 보면 모습은 다 각양각색으로 다르지만 뿌리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죠? 저 나무들의 뿌리가 말입니다. 꽃나무든 버드나무든 소나무든 간에 각 나무는 바로 자기 뿌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없으면 잎새 하나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도 역시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생명의 근본, 주인공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말을 하게 되고 움죽거리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어떻게 믿느냐 하면 저 형상을 믿고 말입니다, ‘형상을 믿고’라는 말은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상대를 믿어서 기도하는 이런 방식으로 나간다 이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공덕이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공경하고 스님네들한테 옷을 해 주고 밥을 해 주고 절을 지어 줬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복이라고 그러느냐? 내 나무는 내 뿌리하고 정맥 동맥이 상통하듯 그렇게 돌아갑니다. 뿌리와 나무가 위에서는 공기, 태양,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아래에서는 땅의 지기와 철분과 황분과 수분 모두를 흡수해서 위로 올려보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하는 겁니다. 한쪽만 있어 가지고는 다른 한쪽이 돌아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지금 사시는 게 물질세계의 한쪽만 가지고 사시는 겁니다. 물질세계 50%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정신세계 50%가 부족하죠. 즉 말하자면 사람이 동맥이 있는데 정맥이 없다거나 정맥은 있는데 동맥이 없다거나 이런다면 아예 사람 구실을 못하죠. 그렇듯이 내가 내 뿌리를 믿어야 그렇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 뿌리를 믿지 않고 내 나무가 울창한 딴 나무를 보고 ‘아이구! 저 나무! 저 나무가 저렇게 큰데 나에게 에너지를 좀 주었으면…. 나를 잘되게 했으면….’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기복입니다. 그 나무에서 이 나무로, 이 나무 뿌리로 올 수가 없거든요. 이 나무로는 절대로 올 수가 없습니다. 또 딴 나무 뿌리가 이쪽 나무를 도와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이웃에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먹고 싶어하면 조금 줄지언정, 즉 복은 조금 있을지언정 공덕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뜻을 자세히 파악하시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한 철 나는 건데 그 한 철 동안에 어떻게 해야 옳으냐는 것을 한번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기복으로 하는 건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복으로 한다면 주변 동네에서 쌀이나 몇 됫박 얻어먹을 뿐이지 내가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해서 내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 나무는 내 뿌리를 믿고 내 뿌리만이, 내 주인공 뿌리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우리 가정을 이끌어 줄 수 있고 우리 모든 식구를 다 밝게 살게 할 수 있다, 스위치 하나만 올리면 우리 가족 전체가 다 불이 켜져서 밝게 살 수 있다는 거를 명심하십시오…
2007-06-11 오후 6: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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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