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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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신라의 차
우리는 최고의 멋을 표현할 때 ‘자연스럽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자연스럽다는 말을 최고의 멋으로 여기는 민족은 우리 민족 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을 신화나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 제의(祭儀)를 통해서 자연의 힘을 얻고자 하였다. 이때 사용되는 음식은 얼마나 정성스럽고 귀한 것이겠는가. 이런 제물 속에 일찍부터 차(茶)가 있어, 차의 기원에서 전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화와 고사가 담겨져 있다. ‘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元曉, 617~686)가 사포와 함께 부안 변산 내소사 옆 암자를 찾아갔다. 사포가 원효에게 차를 바치려하였으나 천수가 없어 고민이었다. 갑자기 바위틈에서 물이 샘솟아 이물로 차를 끓여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강릉의 동쪽 15리 큰 바다에 다다르면 푸른 솔이 우거져있다. 다천(茶泉)과 돌 부엌, 돌절구(石臼)가 있으니 화랑선도들이 무리지어 노닐던 곳이다.” 이곳은 한송정으로 <동유기>에도 “사선(四仙)이 놀던 곳을 한송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정자도 없고 소나무도 그전과 같지 않지만 돌 부엌과 석지(石池)와 석정(石井)만 남아있어 옛 사선들이 차를 마신 흔적만을 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차를 달였다는 돌 부엌은 고려 명종 때 김극기(金克己)가 시에서 ‘차를 달이던 부엌 이제는 헐고 이끼만 무성하여 거칠어졌네’라고 말한 구절에서 보듯, 지금은 더욱더 흔적이 없어져 이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차는 이렇게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본래 화랑도는 나라에 유용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로 화랑들은 무리지어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며 도를 닦고 시가와 음악을 즐겨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처럼 신라의 정신적 풍토를 지배했던 화랑들이 심신을 닦을 때나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사용하였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충담사가 경주 남산 차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덕왕(742~764) 을 만나 물으니,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공양한다고 하였다. 경덕왕이 ‘과인에게도 차 한 잔 줄 수 있냐’고 물어 차를 달여 드리니 차 맛이 특이하고 특별한 향기가 풍겼다. 이에 왕이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당시 신라는 미륵사상이 수용되었던 시기이다. 신라인에게 경주 남산은 보국(保國)의 의미를 가진 산으로 이곳에서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고 왕에게도 차를 올린 충담사의 나라를 위한 충절과 청빈을 알 수 있게 한다.
경덕왕 19년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를 부르니 없어졌다고 한다. 이에 보답으로 경덕왕이 월명 스님에 차와 염주를 하사했다. 이처럼 초기의 차는 부처와 왕에게 올려지고 또한 왕의 하사품이 되는 귀중한 물품이었다.
즉 신라시대 신앙은 미륵신앙이 융성하였던 시기로 차는 부처에 대한 공양물로 시작되어 제사(祭祀)와 일부 고승과 왕만이 마시는 것이었다. 점차적으로 사찰과 귀족에게 확대되어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흥덕왕 3년(828)에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2007-06-11 오후 6: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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