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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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스님 (4)
창수(昌洙) 수좌가 망월사에서 용성 조실께 삼배를 드리고 꿇어앉자마자, 용성 스님이 물었다.
“십마물(什 物) 임마래(恁 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는 물음이다.
이에 창수 수좌는 주먹을 불쑥 내밀며 아뢰었다.
“임마물(恁 物)이 여시래(如是來)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는 대답이다.
용성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여시 여시(如是如是)니라.”
‘그렇다 그렇다’ 하는 긍정의 표현이다.
잠시 후, 용성 스님은 붓을 당겨 창수 수좌에게 인곡당(仁谷堂)이라는 법호와 함께 ‘인곡당 창수 장실에 보임(示 仁谷堂昌洙 丈室)’이란 전법게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렸다.

“어진 마음이 천지를 감싸안으니(人心抱天地)/ 깊은 골짜기 또한 밝고 밝도다(玄谷又明明)/ 온갖 조화가 이에서 일어나니(造化從斯起)/ 영원토록 생멸하지 않도다(亘古不生滅).”

인곡(1895∼1961년) 스님은 23세에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자(無字) 화두와 씨름한 지 9년만에 용성 스님의 인가를 받고 입실제자(入室弟子)가 된 것이다.
위 문답에서 용성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한 질문은 육조혜능 스님이 남악회양 스님에게 던진 공안과 같다.
이 질문에 회양 스님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여 인가를 받았고, 인곡 스님은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답하여 인가를 받았다.
회양 스님과 인곡 스님의 대답은 서로 다름에도 똑같이 인가를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 뭣고?’ 화두의 대상인 ‘한 물건(一物)’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를 초월한 ‘그 무엇(거시기)’이기에 뭐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맞지 않지만, 이름 붙이지 않고 쓴다(作用)면 또한 ‘거시기’ 아닌 적이 없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보고 듣고 쓰는 그 모든 것이 ‘거시기’이지만, 깨닫지 못한 이에게는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는 것이다.
모기 주둥이처럼 공안에 들이대는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한 물건’에 대한 용성 스님의 법문을 가슴 깊이 새기며 있는 힘껏 참구해 보자.
“이 물건은 육근(六根)으로 이뤄진(構造) 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 없이 항상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상관 없이 항상 있으며, 공(空)하고 공하지 않은 것에 상관 없이 항상 있다.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않는다. 밝은 것은 무량한 일월로도 비준할 수 없고, 검은 것은 칠통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크도다. 천지세계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 곳이 없다. 참으로 작은 것이다. 가는 티끌에 들어갔으되, 그 티끌 속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하고 단지 의심하여 불지어다.”(수심정로)
김성우 객원기자
2007-06-12 오후 5: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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