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73>그 누구라도 임종할 때에는
사람들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가졌다고 해도 중생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헛된 삶이니, 목숨을 거둘 때 금생의 나쁜 업만 지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복을 짓는 것은 삼생(三生)의 원수나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무엇 때문에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말씀하셨는가? 첫 번째 생에서 어리석은 복만 짓느라고 견성(見性)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에서는 전생에 지어 놓은 어리석은 복을 받아쓴다고 공부를 하지 않아 그저 업(業)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생에서는 전생에 어리석은 복만 받아쓰고 수행을 하지 않았기에 몸을 떠날 때 쏜살같이 지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받기 어렵고 부처님의 법은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선가귀감> 73장에서 말한다.

凡人 臨命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不來 生時 性亦不生 死時 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自由人也. 若見諸佛 無心隨去 若見地獄 無心怖畏. 但自無心 同於法界 此卽是要節也. 然則 平常是因 臨終是果 道人 須着眼看.

그 누구라도 임종할 때에는 오온이 다 공(空)이요 이 몸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통찰해야만 한다. 참마음은 어떠한 형상이 없으므로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니, 이 몸이 생겨날 때에도 본디 성품은 여여(如如)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이 몸이 죽을 때에도 그 성품은 여여(如如)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고 오롯하여서 마음과 경계가 하나이다. 오직 이와 같이 보고서 단숨에 바로 깨쳐 삼세의 인과에 얽매이지 않아야 세간을 초월하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만나도 그 경계에 집착하여 따라가려는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아도 그 경계에 놀라지 않으므로 두렵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없다. 오직 스스로 무심하여 법계와 하나가 되어 같아질 뿐이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공부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지은 업이 씨앗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 그 과보를 받게 되니, 도를 닦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점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오온’과 ‘사대’로 이루어진 중생의 몸은 인연의 조건이 갖추어져 이루어진 것으로서 실체가 없는 것인데 중생들은 이것에 집착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 집착이 중생을 육도에 윤회하게 하는 ‘생사의 뿌리’이다. 덧없이 무너질 몸에 집착하게 함으로써 이것들이 마구니가 되니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이 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몸과 알음알이 마음 작용은 무상(無常)하여 그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여 벗어나지를 못하므로, <선가귀감>에서 수행자들은 그 실체가 ‘공성(空性)’임을 통찰하라고 한다. 우리들이 그 자리가 공(空)임을 알 때 늘 여여(如如)하여 변하지 않는 본디 성품인 참마음이 드러난다. 참마음은 지극히 맑고 고요하고 오롯하여서 마음과 경계가 하나이다. 인과를 벗어나 세간을 초월한 자유인으로서 모든 집착을 떠나 무심해질 때에 부처님 세상인 법계 그 자체가 된다.

마음 닦는 공부는 헛됨이 없다. 마음을 다하여 수행한다면 설사 금생에 알지 못하더라도 반야의 씨앗을 깊이 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숨을 마칠 때도 업의 분별에 끌려 그 어떤 악취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몸을 바꾸어서 다시 태어날 때에도 무명번뇌가 나를 어둡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공부를 잘 살피고 살펴야 한다. 무상한 세월이 빠르기에 생사를 밝히는 일이 더 큰 것이다. 몸과 마음이 튼튼할 때에 일찍이 이 공부에 힘을 쓰기 시작한다면 늙어서 시작하는 것보다도 공부의 힘이 훨씬 더 뛰어날 것이라고 서산 스님은 말한다.

死老年親釋迦.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서야
부처님을 가까이 하도다.

이것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람인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의 앞 구절은 “젊어서 부와 명예를 구할 때에는 공자를 그리워하다가[求名少時慕宣聖]”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젊을 적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입신출세(立身出世)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고 싶은 마음에 세속의 부와 명예에 집착하여 바쁘게 살다가, 죽음이 가까워진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두려운 마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게 된다는 뜻이다. 때는 많이 늦었지만, 백발이 성성하여 기력이 없는 늘그막이라도 정신 차려 최후의 한 생각을 바로 가짐으로써 영원한 빛이요 생명인 극락정토의 아미타 부처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好向此時明自己 百年光陰轉頭非.

이런 때에 눈을 떠서 자신의 마음을 애써 밝혀야만 하니
백 년 세월도 몸을 바꿀 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느니라.

중생의 삶이란 부처님의 품을 벗어난 나그네 인생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중생의 죽음이란 나그네 인생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빛이요 생명인 아미타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이 부처님을 보기 위해서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중생의 몸과 마음 자체가 인연의 조건이 갖추어져 이루어진 것으로서 실체가 없는 ‘공(空)’임을 통찰해야 한다. 덧없이 사라질 부질없는 중생의 인연을 벗어나 수행자가 공성(空性)을 깨달아 들어간 부처님의 세상을 야부(冶父) 스님이 <금강경>을 풀이한 게송에서 말한다.

自少來來慣遠方 幾廻衡陽渡瀟湘
一朝踏着家鄕路 始覺道中日月長.

어릴 적부터 줄곧 나그네 노릇을 하면서
몇 번이나 산을 돌고 큰 강을 건넜던가?
어느 날 아침에 고향 길을 밟고 보니
부질없이 객지에서 긴 세월을 보냈구나.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6-11 오후 5:18:19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