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 깨달음을 이루고자 출가한 사람들을 우리는 스님이라고 한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마음속에 있는 애욕을 버리고 세상의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을 출가한 스님이라 한다”라고 말하였다. 먹물 옷을 입고 삭발한 스님들의 차림새는 세상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품새로 사는 까닭은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떠나 오로지 부처님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스님이란 먼저 부처님의 법을 배워 그 가르침에 정통해야 하고 그 근본 뜻을 깨우쳐야 한다. 그런데 이 공부를 이루기도 전에 부처님 공부와 상관이 없는 다른 곳에 마음을 쓴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수행자의 옷차림을 하고서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해서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한 탐욕이나 다름없다. 이런 수행자의 모습을 원효 스님은 “세상 사람을 속이려고 마치 굶주린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다”[狗被象皮]라고 하였다. <선가귀감> 56장에서 말한다.
出家人 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用 而刀自傷焉
출가한 사람이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칼로 끈적끈적한 진흙을 자르는 것과 같다. 잘라진 진흙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예리한 칼만 망가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출가인(出家人)은 집과 세상살이를 떠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행하여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말한다. 부지런히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마음의 근본자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아함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르기를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떠나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서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바깥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감싸 조금도 해를 끼치려는 마음이 없다. 즐거운 일이 생겨도 기쁘다고 마음이 들뜨지 않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크고 넓은 대지처럼 모든 것을 감싸고 잘 참아내 수행하므로 출가한 스님이라고 한다(捨離恩愛 出家修道 攝御諸根 不染外欲 慈心一切 無所傷害 遇樂不欣 逢苦不戚 能忍如地 故名沙門)”라고 하였다.
출가인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첫째 몸은 출가했지만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다. 겉은 출가한 사람의 모습인데 쓰는 마음이 아직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세속 사람과 똑같기 때문이다. 세속의 옷을 수행자의 옷으로만 바꾸어 입었을 뿐으로 출가해도 별로 이익이 없는 사람이다. 둘째 마음은 출가했으나 몸은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다. 세속에 살지만 언제나 수행에 힘쓰고 사는 사람이니, 중국의 방거사 인도의 유마거사 한국의 부설거사와 같은 분들이다. 셋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출가하지 못한 사람이다.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세속의 욕망에 휩싸여 사는 사람이다. 넷째 몸도 마음도 다함께 출가한 사람이다. 겉도 출가인의 모습이고 마음을 쓰고 살아가는 것도 부처님과 똑같은 사람이다. 이것을 호심출가(好心出家)라고 한다.
갓 출가한 사람들을 위한 책 <사미율의>에서 몸도 마음도 다함께 출가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출가한 스님이란 생로병사에 중생의 고통이 가득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중생계의 모든 것이 덧없어 자신의 것으로 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육친의 지극한 은혜와 사랑도 거리낌 없이 사양하며 오욕의 깊은 집착을 떨쳐버리려는 사람이다. 이런 마음가짐이므로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다. 사회생활에 실패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사는 사람도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 부처님의 힘을 빌려 구차하게 생활을 유지하려는 것도 아니다. 넉넉한 절집살림살이 덕에 게을리 살며 편안한 생활을 훔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깨달음을 위하여 깊은 믿음을 가지고 출가한 사람이다(怖四怨之多苦 厭三界之無常 辭六親之至愛 捨五欲之深着 不爲名利所牽 不爲王力所逼 不爲邪求活命 不爲避懶偸安 爲生死爲菩提 持信出家)”
출가한 사람이라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면 출가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과 선서, 어록은 내전이라 하고 부처님 가르침 이외의 세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담은 책들을 외전이라고 한다. 외전을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하여 <대론(大論)>에서 말하기를 “외도의 경전을 읽고 배우는 것은 마치 칼로 끈적끈적한 진흙을 자르는 것과 같다. 진흙이 뜻대로 잘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쓰면 쓸수록 칼만 망가진다(習外道典者 如以刀割泥 泥無所成 而刀日損)”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외도의 경전을 읽는 것은 태양빛을 보는 것과 같아 사람의 눈만 멀어진다(讀外道典者 如視日光 令人眼暗)”라고 하였다. 이처럼 출가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아두고 다른 공부에 마음을 쓰고 있다면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도 서쪽 길로 가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의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 출가의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외전보는 것을 무조건 금한 것은 아니다. <유부비내야잡사(有部毘奈耶雜事)>나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을 보면 “불교도들이 부처님 경전 이외에 다른 책들을 절대로 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한 비구들은 분명히 다른 책들을 섭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혜롭고 총명하여 공부를 많이 한 비구들이라면 공부하는 시간의 삼분의 일은 다른 책들을 읽고 연구해도 좋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뒷날 부처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설득할 준비를 하는 것이며, 혹 세간에서 일어나는 여법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 시의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속을 떠나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쓸 목적이라면 외전일지라도 참고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르면서 세속의 잡서에 취미를 붙이거나 그것에 몰두하여 문학이나 예술을 익힌다는 것은 칼로 진흙을 자르는 것처럼 수행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이것은 출가한 사람이 세상살이에 다시 뛰어드는 격이다. 마치 <법화경>의 비유처럼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타는 집에서 구하기 위하여 장난감과 보배가 가득한 수레를 주겠다고 방편으로 설득하여 가까스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위험을 모르고 아이들이 다시 불타는 집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 참으로 어리석지 않을 수 없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門外長者子 還入火宅中
문 밖에 나와 있던 장자네 아이들이 다시 불붙은 집 안으로 들어가도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