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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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라는 것은 이름이요 부처 없는 것이 부처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삼라대천세계에 꽉 차 있다!

초를 켜고 불을 밝히는 이유?


부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셨지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2007년 한 해가 또 밝아 왔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다른 사찰에서도 그렇지만 선원에서도 촛불재를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신년기도회가 아니고 촛불재인지요? 그리고 특별히 초를 켜고 불을 밝히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그러면 왜 우리가 정월이면 촛불재를 올리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왜 불이 그렇게 귀중하고 그런가 하는 것을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생명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돼 있었을까. 우리가 바람과 흙과 물과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그 속에서 세 가지가 모두 한데 협조하는 바람에 그 가운데서 불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 불이 생겨서 곳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그러니 모두가 지수화풍으로 둘러싸이게 돼 있었죠. 그래서 스스로 생명체들이 생겨나게 돼 있고요. 가만히 보세요. 지수화풍의 수분과 흙과 바람과, 바람이라면 즉 공기와 모든 게 종합되지 않는다면 생명체가 생길 수가 없어요. 모든 게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흙을 갖다가 그냥 오래도록 쌓아 놔도 그 흙 속에서 생명체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 것과 같이 생명체들이 그렇게 해서 창조가 됐다고 하는 거죠.
생명체들이 생겨나기만 했으면 또 뭘 합니까? 생겨나 가지고 그 모든 게 조절이 되질 않아서, 크기만 하고 조절을 못하니 차원의 질서가 잡히지 않고 이렇게 되니까 뒤죽박죽이 되고, 먹히는 놈도 그렇고 잡아먹는 놈도 그렇고, 무슨 차원의 질서라든가 이런 게 없이 모든 게 그렇게 아수라장이 돼 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이 지수화풍도 하나하나가 생명이 있는 거고 하나하나가 그 마음이 있는 거라, 모든 게 종합이 돼서 도저히 이렇게 해 가지고는 될 수가 없다. 이건 개벽을 해야만 되겠다. 말하자면 개벽이 아니라 개혁이죠. 개혁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 생명체들로 하여금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즉 말하자면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체, 개혁을 한 거죠.
개혁을 하고 나니까 어떠한 것이 생겼느냐 하면 질서도 지키게 됨으로써 감각이나 지각이나 시각ㆍ촉각ㆍ청각ㆍ미각 이 여섯 가지에 달하는 문제들이 제각기 등장을 하게 된 거죠. 차원에 따라서 여섯 가지가 다 등장이 되지 않은 것도 있고 여섯 가지가 등장이 된 것도 있고, 차원에 따라서 세 가지만 된 것도 있고 두 가지만 된 것도 있고 한 가지만 된 것도 있고, 그 차원에 따라서 종류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등장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또 개혁을 한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조절하고 제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문에 들게 한 것도 됩니다. 그래 가지고 모든 생물이 살다 보니까 그때에 태어났던 생명체들이 개혁에 따라서 다시 태어나게 되니까 다시 태어난 짐승들은 모두가 소식(小食)을 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풀을 먹고 사는 짐승들이 있는가 하면 또는 자기 자신들의 생사를 거론할 수 있게도 됐답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서는 생사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실천하고 이러다 보니까, 제일 나중에는 사람까지 등장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돼 가지고 생사를 논의하게 되다 보니까 아, 이 불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중하구나! 이 불성이라는 것도 귀중하지만 최초에 우리가 어디서 생겨났나?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됐죠. 먼저 태어나서 경험한 사람들은 전부 사람이 살 수 있는 농사일들이라든가, 사람이 살아나가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하는 이 생활 도법을 그대로 익히면서, 또 가르침을 받아 가면서, 연쇄적으로 차원을 높이면서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가 불성이 근중한 줄 알게 됐더랍니다.
우리 이 불로 인해서 생명체들이 찾아왔다고 그래서 과거 몇 억겁 전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으로써 뭉쳐서 지수화풍을 또 먹고 삽니다. 그런데 지수화풍으로부터 와서 지수화풍으로 또 가죠. 지수화풍으로 또 가면 사대(四大)가 흩어져 버려 지수화풍 자체가 제각기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소립니다. 즉 말하자면 불바퀴다 불기둥이다 이런다면 불 하나의 기둥에서, 쉽게 말해 그 불바퀴에서 모든 게, 마음이라는 입자가 나간다면 그게 바로 또 불바퀴가 되고 또 원자가 됩니다. 그렇듯이 인간의 그 생명의 창조도 역시 마음으로써 그 원자, 근본 하나에서 또 입자로 종자를 만들면 그 종자가 씨가 되고 씨가 돼서 싹이 되고 싹이 돼서 또 종자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퍼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귀중하게 해야 되느냐. 이 마음의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써 마음과 더불어 자신과 즉, ‘자(自)’는 이 몸이 되고 ‘신(神)’은 자기 불성(佛性)이 되는 겁니다. 이게 자ㆍ신이 다 둘 아니듯이 촛불재를 하는 것도 마음에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들질 않게 되죠. 마음에 있으니깐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그게.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가설이 돼 있다는 것도 모르니 한 가정이라도 그것을 알아야 전체가 다 가설이 돼 있다는 거를 알고 넓고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도 내 마음이 밝혀지면 그 마음도 밝혀진다는 얘깁니다. 자식을 둔 사람들은 또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습니다, 부모라는 가설이 돼 있고. 그것이 자연의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가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듯이 우리가 스스로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간에도 가설이 돼 있는데 형제간에는 부모와 자식보다는 좀 덜하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덜 가는 겁니다. 친척도 손바닥 다르고 손등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 데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만 밝아질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밝아져서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촛불입니다. 더군다나 조상님들도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쓰고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모습 쓰고 나온 대로 대접을 받게 돼 있거든요. 잘 생각들을 해 보십시오. 항상 내가 얘기하죠. 개로 태어난다면 개 대접밖에 못 받고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짐승 대접밖엔 못 받는다. 돼지로 태어난다면 돼지 대접을 받을 거고 닭으로 태어난다면 닭 대접밖에 못 받는다. 사람으로 태어나도 천하게 태어나면 천한 대접밖에 못 받는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걸망 짊어지고 한 철 나와서 모두 모여서 놀다가 해가 지면 제각기 헤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깐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놀고 어떻게 말을 하고, 그러한 데에 따라서 금방 찰나에 벌써 한 생이 지나고 무대가 내리면 벌써 요 다음의 모습은 자기가 사는 데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정해지죠. 그러니까 요 한동안 우리가 혼자 와서 모두 같이 놀다가 가는 거와 같은 거예요, 우리 인생이.
그리고 꿈도 생시도 둘이 아니란 얘기죠. 둘이 아닌 까닭에 여러분이 꿈을 잘못 꿨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도 ‘어허! 이거는 주인공의 뜻이니까 그것도 잘되게 하는 것도 너뿐이야.’ 하고 이렇게 바꾸어 놓으면 구정물을 그냥 삽시간에 맑은 물로 바꾸어 놓는 거죠. 체는 바꾸어 놓을 수 없어도 바로 그 뜻은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체로 나오는 게 말갛게 나온단 얘기죠.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아, 한 생을 살아나가는 데에 아주 값진 내 보배를 내 보배로 활용해서 살아가시면서 발전하고 또는 체험하시고, 장래의 2세들한테도 그 모든 묘법이 미치게끔 하고 부모에게도 손색이 없이 밝아지게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렇게 그것이 귀중하다는 거를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거기서 조금 조금 챙겨서 자기가 잘 생각해 보면 알 바가 있습니다. 대충 그냥 이렇게 하겠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자고 하는데…


먼저 감사드립니다. 저의 집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에는 저와 함께 교회에 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불교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 상태지만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에 집사람이 교회에 갈 때 보통은 함께 다녔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받으라고 해서 세례도 받았고, 두 아이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장모님도 독실하신 분으로 이웃하여 살고 있습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한마음선원 법형제법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아직 신도 등록도 안 했지만 대행 스님의 설법을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 그날만 참석합니다. 게다가 이제는 교회에 안 가려고 핑계거리를 늘상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을 집사람이 막지는 않지만 너무 힘겨워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지혜로운 처사인지요.

여러분이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들어도, 시집 쪽에서 불교를 믿으면 불교로 따르고 기독교를 믿으면 기독교로 따르세요. 따르되 타력 신앙으로 믿진 말고 자기 주처를 믿으라는 겁니다. 자기 가는 데마다, 기독교 교회에 앉아 있어도 네 자리가 내 자리고 불교의 법당에 와 앉아 있어도 네 자리가 내 자리니까 그 믿음을 잊지 말고 지조를 가져라 이거죠. 사람이 그렇게 얄팍하게 기독교 불교를 따져서 종교의 이름을 짓고 싸운다면 여러분은 부처님이 가르친 뜻은 하나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벌레처럼 짐승처럼 이렇게 윤회에 말려서 수억겁을 거쳐도 벗어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그런 말을 가끔 합니다만 ‘부처는 없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꽉 찼다.’ 이겁니다. 만약에 부처 하나로서 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꽉 찼지 만약에 부처가 있다면 부처가 꽉 찼을 수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넘나들면서 그대로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이름이요, 부처 없는 것이 부처란 뜻은 이 세상에서 아주 제일가는, 세계의 왕을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인 것입니다.
그러니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아내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서로 감싸 주면서 사셔야 합니다. 지금의 부부로만 인연이 된 게 아니거든요. 형제이기도 했다가 딸이기도 했다가 아버지이기도 했다가, 그렇게 수만 개로 나투면서 수만 이름을 가지고 이날까지 나왔거든요. 여러분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어머니예요. 그래서 육을 기르는 거죠. 그리고 정신을 길러 주는 아버지는 태양과도 같고 바람, 공기와도 같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항상 같이 있는 겁니다. 자식과 부모의 마음은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자식을 낳고 속을 썩다 보니까 전자에 길러 주신 부모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거를 굳이 말을 안 해도 아시겠지만 한마디 합니다. 생각이 납니까, 안 납니까? 누구를 막론해 놓고 자식으로서 의지만 하고 그냥 살다가 자기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으로 인해서 속을 썩고 또 행복하고, 이런 양면을 우리가 다 볼 때에 ‘아유! 우리 부모가 나를 기르고 우리 형제들을 기를 때 이러이러했고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그렇게 삼분지일은 알 수 있단 얘깁니다. 삼분지일을 알면 다 아는 거죠. ‘아하! 내가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이렇게 속을 썩다 보니까 아이구, 우리 부모도 그러셨겠구나!’ 그러니 지금 부모만이 아니라 여러분한테 그렇게 자비로웠던 부모의 마음, 또 여러분이 자식을 두고 사랑했던 그 마음이 한데 합쳐서 뭉쳐진 여의주 구슬, 보배, 그것이 불성 자체에 응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면 부처님한테 갈 필요도 없겠네요.” 이러겠지요. 그게 아닙니다. 어느 법당에 가든지, 가톨릭교나 기독교를 믿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더라도 주처는 바로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자기한테! 그런데도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기복 아닌 게 없어요. 이러니 이거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림을 보거나 형상을 보고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러면 부처님 믿으러 갈 게 없지, 형상을 믿지 말라니까.” 이러겠지만 그게 아니죠. 당신들의 몸도 형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아주 한생각을 돌려서 잘 믿는 데 달려 있는 겁니다. 법당에 가더라도, 만 불(萬佛)이 놓여 있더라도 내 한마음의 일 불(一佛)입니다. 만 불도 일 불이요 일 불도 만 불입니다. 이 도리를 꼭 알아 둬야 되겠습니다.

불사를 많이 하는데…

요즘에 가는 곳마다 대규모 불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이왕 짓는 것 크게 짓자고 마치 유행처럼 앞을 다투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대작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런 현상이 한국 불교의 어떤 인연을 말해 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사를 시작하는 사찰이면 으레 모연문을 내고 기원법회를 자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원의 경우는 너무나 조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무소 보살님께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보살님 말이 “부처님 일인데 잘되겠지요.”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렇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무리 부처님 사업이라 하지만 마음을 내고 손발을 놀리는 것은 인간의 일인데 이렇게 조용해도 여러 지원에서 펼치는 불사들이 계획대로 잘되는 것인지요?

나는 예전에 저 상원사(上院寺)를 지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네놈이 있다면 지을 것이고 네놈이 없다면 못 지을 것이지, 그 뭐 나만이 지으라고 등에다 써 붙였나?’ 안 그렇습니까? 왜? 딴 사람들의 그 마음을, 어려운 사람들은 아주 귀찮을 거란 말입니다, 괴롭고. 하지 못하니 참 괴롭고 또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조금 하지만 그것도 어떤 때는 “내라! 내라!” 하면 아주 괴로울 겁니다. 외려 스스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내버려두는 게 낫지.
그리고 또, 아래로는 그렇게 내버려두고 편안하게 생각하게끔 해 주는 게 좋고, 위로는 ‘모두 너의 집인데 너가 있으면 할 거고 너가 없으면 못 할 거지, 뭘 그래?’ 하고 하는 거지, 아니 ‘내 이 집을 못 지으면 꼭 너를 죽인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이건 내 집이라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여러분의 집이기 때문에 여래의 집이라고 할 수 있죠. 여러분이 다 여래입니다. 여래의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여래의 집을 짓는데 여래들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왜 애를 씁니까?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내가 가끔 했죠. 양 무제가 달마 대사한테 묻기를 “이렇게 많은 시주를 하고 절을 지어드리고 스님들의 옷을 해드리고 밥을 해드리고 이렇게 많은 시주를 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거든요. 그러니까 “공덕이 하나도 없다.”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얄밉겠어요, 허허허. 그랬듯이 우리가 이 마음의 도리하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거는 헛 시주입니다. 헛 시주!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없어야 되겠죠.
그런데 시주라고 하는 것은 여기다가 놔도 또 지원의 스님한테다 줘도 그 스님 자체가 받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돼야 합니다. 그 스님 자체가 받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준 것도 아니게 됩니다. 왜냐? 자기 거를 자기가 한 거지, 자기네 그 가족들한테로 무심통장을 한 거지 그건 개별적인 우리들을 준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시주를 할 때는 항상 생각을 하고 그냥 무심코 받는다 하더라도 그거는 우리를 준 게 아닙니다. 우리 스님네들을 준 게 아니고 불사를 하라고 줬어도 그건 앞으로 자기 불사를 하기 위해서 준 거지, 이 중들의 불사를 하게 하기 위해서 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께서는 양 무제더러 네가 이 시주를 하고, 네가 시주한 거는 대가를 바라고 또 시주를 내가 했다고 만백성들한테 풍기고 그러고 했으니 무슨 시주가 공덕이 될 게 있느냐 이거야. 그러니 하나도 한 게 없다 이거야.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시주를 해도 누가 요만한 거 하나 거저 먹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우리 한마음선원의 식구들은 말입니다. 거저 먹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모두 자기네들 자기 밥들 먹고 사는 스님네들이란 말입니다. 왜 그러면 남들이 갖다 주는 밥 먹고선 왜 자기 밥들이라고 하느냐. 그거는 자기 할 일을 다 잘하고 가니깐, 자기 할 일을 하고 가니깐 그 밥을 자기가 내려먹을 수 있으니까 자기 밥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억만금을 갖다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넘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 눈을 희번덕거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주머니 차지 않을 겁니다. 그거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근중한 내 부모가 내 종자를 줬고 그 종자로 인해서 몸을 탄생을 시켰는데, 그 몸을 탄생을 시킨 것도 제대로 못 가지고 갈 걸, 영원히 가지고 못 있을 걸 왜 그거를 짐을 지겠습니까? 내가 왜 짐을 집니까? 여러분의 짐을 왜 내가 집니까? 그냥 그거를 받아서 여러분을 위해서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쓰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시지 마세요. 우연히는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거저도 없고, 우연히도 없고 꼭 내가 한 거만큼 내가 하는 대로 이렇게 갈 것입니다.
2007-01-29 오전 10: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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