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이때쯤, 나는 공주교도소에서 한창 징역을 살고 있었다. 1986년 때 이른 여름더위가 뜨겁던 5월, 인천 주안네거리에서 있었던 ‘5·3인천항쟁’의 주범으로 1년6월의 실형을 받았다.
지금은 교도소 안에서 신문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까막소’에 있으면 세상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면회 오는 집사람을 통해 87년 1월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그렇게 알았다.
아, 어떻게 이 사실이 세상에 밝혀졌을까? 그 이전에도 숱한 사람들이 고문과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어떤 사람은 발목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매달린 채 바다 속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이 사실은 세상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박종철의 죽음은 곧바로 정확하게 드러났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그 이전 숱한 사람의 목숨이 민주화의 거름이 되었고 이제 종철이의 죽음으로 민주화의 꽃망울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진작에 한국천주교는 박정희 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여기에 비해 한국불교는 거의 외면한 채 세월을 보냈다. 아니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독재정권이 조정하는 ‘반공궐기대회’에 동참하는 ‘배신’의 모습을 보였다.
80년대 중반 젊은 불제자들이 나섰다. 민중해방의 새 세상을 만들자고, 그것이 참으로 이 사바세계를 정토로 만드는 일이라고 외쳤다. 어느덧 이런 외침이 세력화되던 참에 종철이의 죽음은 커다란 파도를 일으켰다. 아름다운 청년 불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각성이 일었다.
종철이의 49재가 있던 날, 87년 3월 3일을 기점으로 실로 한국불교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님들이, 사부대중이 대거 거리로 나와 국가공권력과 맞서기 시작했다. 승복이 최루탄가루로 뒤덮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냈다. 6월 항쟁은 국제사회에서도 민주화투쟁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고 있다.
낡은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평등한 세상으로 통합할 것을 주장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기꺼이 근로대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야 한다. 민불련의 기치도 이러하였다. 87년 여름, 한국불교가 마침내 기만과 위선의 낡은 껍질을 벗어버렸다.
나는 6월 항쟁 덕분에 형기를 두 달 정도 앞두고 석방되었다. 7월 8일 공주교도소를 나오자마자 집사람과 민불련 동지들이 마련한 승합차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학교는 시민들로 가득 찼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렬 열사의 영정으로 장엄한 무대에 올라 ‘가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누구라도 마음껏 즐겁게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외쳤다. 안타깝게도 박종철 열사, 이한렬 열사의 바람대로 87년 민주화투쟁이 민중의 해방된 세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5년째 민주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신자유주의’의 수탈체제는 여전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인권보호소로 변모한 정도이지 실제로 보안법은 버젓하게 살아있다.
삶의 질은 더 나빠지는데 국민소득은 올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의 편중이 더 극심해졌다는 반증이다. 민중의 아픔이 여전하니 민중불교운동의 당위성도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87년 정신’은 어느새 가뭇없어졌다. 94년의 모습도 이젠 사라졌다. 다시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 서야한다. 항쟁의 성과를 누린 소수의 정치권 인사를 시비하는 건 힘 낭비다. 민주화의 질을 한층 높이는데 한국불교가 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