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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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근대(近代)의 차(茶)/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과 한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 대략 한족이 93.3%를, 소수민족이 6.7%를 차지한다. 소수민족은 진시황 이래 중국의 통일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淸)을 건국한 만주족 역시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해 한족을 관리로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한족 문인들은 반청(反淸) 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풍류문사(風流文士)로 나날을 보내며 그들이 지향했던 넓은 포부와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 시기의 차인(茶人)들은 소극적인 이들의 정서를 변호하였으며 “차(茶)는 곧 도(道)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차를 대하는 태도는 세속적 관심을 추구하지 않고 경쟁을 하지도 않았으며 국사에 참여하기를 싫어한 차인들의 정서를 반영한다. 차를 마실 때에도 차에 대한 관점이 일치하기를 원치 않고, 자기의 뜻과 상대의 뜻이 합일(合一)되기 위해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차는 사람이 적을수록 마시기 좋다하여 혼자서 마시면서 신(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차를 대자연에서 찾기보다는 차(茶)를 도(道)로서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를 원한 것이다. 차를 직접 우려 마시기를 즐겨하여 달이는 과정이 간소화됨에 따라 다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차 도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며 다예(茶藝)발전을 가져왔다. 의흥(宜興)의 자사호는 인기가 있어 아주 비싸게 팔렸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좋은 물을 찾아서 물을 관(罐, 항아리)에 담아 장거리로 운반했으며,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전문적으로 운수조직을 만들어 물을 조달하기도 했다. 양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여 미리 주문을 받아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받고 배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ㆍ송 이래 문인이 주도한 차 문화는 대중과의 실생활 속에서 떠나있었지만 대중 속 깊이 일상화된 차는 그들의 잡극에서 항상 말하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7가지 일이 있다. 이 일은 땔감, 쌀, 기름, 소금, 장, 초,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집에서 차관에서, 거리에서, 회의실에서, 언제 어디서나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근대이후 외부의 침략으로 뜻있는 지식인들은 차사(茶事)에 대한 마음 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뜻을 펼치기를 원했다. 표면상 중국의 전통적 다예, 다도는 점점 쇠퇴하여 전통을 잃는데 이르렀으나 우수한 전통문화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차 문화는 대중 속 깊이 침잠(沈潛)되었다. 중국의 차 문화는 일상생활에 합해졌으며 계속적으로 국가 경제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찍이 이루어진 영국과의 차 무역에서 영국은 차 수입을 위해 은(銀)을 지불하였다. 많은 양의 차를 수입하기 위해 밀무역으로 중국인에게 아편을 팔아 은자를 확보하였으며, 이렇게 벌어들인 은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를 구입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 아편이 퍼져 빈민층에서 지주에 이르기까지 아편 중독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 또한 은 부족으로 국민은 세금을 내지 못하여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위기에 이르러 아편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는 1839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며, 결국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내놓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중국인은 아편과 차를 바꾸어 먹은 셈이 되었다.
2007-01-20 오전 1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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