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큰스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을 법문(法門) 한다고 말한다. 법문이란 법문하는 스님 그 자체가 ‘부처님 법’이 되어 깨달음의 길을 열어서 보여 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깨달음의 길을 열어서 보여 주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법문(法門)이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로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본분사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법을 배워 그 근본을 먼저 스스로 깨우쳐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도를 이루기도 전에 남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이 혀끝에 발린 말재주만 일삼아서 스스로 도를 깨친 양 깨달음을 얻은 체한다면, 그것은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한 탐욕이나 다름없다. 이런 수행자의 모습은 마치 더러운 뒷간에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푸르고 붉은 단청을 하는 것과 같다. <선가귀감> 55장에서 말한다.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相勝者 如厠屋塗丹
도(道)를 이루기도 전에 배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견문(見聞)을 남에게 자랑하고 뽐내면서 부질없이 말재주를 부려 조그마한 이익이나 서로 보려고 다툰다면, 이는 마치 허물어져 가는 뒷간에다 푸르고 붉은 화려한 단청을 하는 일과 같으니라.
‘현요(衒耀)’는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어 다른 사람한테 자랑하고 뽐내며 다닌다는 뜻이니, ‘현요견문(衒耀見聞)’은 자신의 견문(見聞)을 남에게 자랑하고 뽐내며 다닌다는 것을 말한다.
‘구설(口舌)’은 입과 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입에 발린 말로써 말재주를 부린다는 뜻이다.
변리(辯利)는 수다스럽게 말을 많이 하여 교묘하게 상대방을 속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말이고, 상승(相勝)은 자신의 이익을 잃지 않으려고 온갖 말재주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도이구설변리상승자(徒以口舌辯利相勝者)’는 부질없이 말재주를 부려 조그마한 이익이나 서로 보려고 다투는 것을 말한다.
‘측옥(厠屋)’은 허물어져 가는 뒷간을 말하고 ‘단확(丹 )’은 붉은 빛의 선명한 흙이나 염료를 말한다. ‘여측옥도단확(如厠屋塗丹 )’은 마치 허물어져 가는 뒷간에다 푸르고 붉은 화려한 단청을 하는 것과 같은 형국을 말한다.
허물어져 가는 뒷간에 푸르고 붉은 화려한 단청이 어울리지 않듯이, 맑고 깨끗해야 할 수행자들이 입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더럽힌다는 것은 수행자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수행자들이 구업(口業)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네 가지 못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는 망어(妄語)이니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본 것을 못 보았다고 하고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들이다. 이는 명성이나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거짓말로서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말들이다.
둘째는 기어(綺語)이니 비단결 같은 말로 푸짐하게 실체가 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화려하게 남의 마음을 속이고 현혹시키는 말들이다.
셋째는 악구(惡口)이니 화를 내면서 험하고 거친 말로 꾸짖고 매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들이다.
넷째는 양설(兩舌)이니 이간질시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 저 사람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 이 사람 말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여 대중의 화합을 깨뜨리고 싸움을 붙이는 말들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別明末世愚學 學本修性 全習爲人 是誠何心哉
이 단락은 말세에 어리석게도 잘못 공부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일깨워 주는 말이다. 배움이란 본디 자신의 성품을 닦는 것인데 공부한다는 것이 오로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이 되어 버리니, 참으로 이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우학(愚學)’은 공부 길을 잘못 알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전습위인(全習爲人)’은 도를 이루려 공부하면서도 오로지 익히는 일이[全習]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爲人]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이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된다.
배움이란 본디 자신의 성품을 닦는 일인데, 이것을 등지고 남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더군다나 수행자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함부로 해나가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는데 깨달았다고 말해버리기라도 하면, 이것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자리를 잃는 것이며 부처의 씨앗을 없애는 결과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비구의 구족계(具足戒)나 대승계의 범망경보살계에서도 이 거짓말을 대망어죄(大妄語罪)로 규정하며 출가인의 큰 죄악으로 다루고 있다. 곧 근본 마음자리를 깨치지 못하고 깨친 체하는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위를 일반적인 거짓말과 구분하여 대망어(大妄語)라고 한다.
율장(律藏)에서는 이 대망어죄를 지은 사람은 다른 비구들과 더불어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여 승단(僧團)에서 축출시켜 비구의 명줄을 끊어 놓는다. 자비를 내세우는 문중에서 사망선고와 같은 이런 중징계를 내리는 것을 볼 때, 공부가 없는데도 있는 척하는 거짓 깨달음이 얼마나 공부하는데 큰 장애가 되는 줄 알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설산에서 6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고행(苦行) 정진을 하셨고 달마 대사는 묵묵히 9년 동안 소림굴에서 벽만 바라보며 참선을 하셨다. 참선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 옛 어른들의 자취를 본 따서 공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를 닦는 사람들은 말을 적게 하고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어지러운 생각들이 가라앉고 말을 적게 하면 슬기로운 마음이 된다. 참된 바탕은 모두 말을 떠나 있는 것이요 참된 이치는 움직이는 허상이 아니다.
입은 불행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켜야만 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초발심자경문>에서 야운(野雲)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身心把定元無動 默坐茅庵絶往來
寂寂寥寥無一事 但看心佛自歸依
몸과 마음 고요하여 흔들림 없고 / 침묵 속에 띠집 토굴 앉아 있으니
텅 빈 충만 번거로운 일이 없어서 / 마음속의 부처님만 마주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