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 1368~1644)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이런 힘들었던 시절은 백성의 질곡(桎梏)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차농(茶農)들이 조정에 공납하는 단차(團茶)를 만들기 위해 받는 고통과 폐단을 알았던 그는 홍무 24년 1391년 단차의 제조를 금지하는 조서를 내렸다. 더 이상 조정에서 단차를 마시지 않자, 민간에서도 자연히 단차의 제조가 쇠퇴되었고 산차(散茶, 잎차)가 전면적으로 유행했다. 이에 따라 산차를 생산하는 농가가 광범위하게 증가했으며, 다양한 제다법이 출현했다.
명초(明初) 주원장은 전통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해 문신들을 관리로 등용했지만 조금이라도 계율에 어긋나면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이러한 고압정책으로 인해 문인들이 더 이상 뜻을 펼치기 어려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예가 많았다. 이들은 세속적 권세에 합류하고 싶지 않아 거문고, 장기, 시, 서화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고상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차를 마시며 담론하고 시ㆍ서화를 논하는 문인풍의 다회를 유행하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권(朱權), 문징명(文徵明) 등이 있다. 문사들은 차의 특징을 몸소 체험해, 차인들의 청절과 스스로 분발하는 적극적인 정신을 차에 반영하여 자기의 이상(理想)을 표현했다. 차를 마시는 도구에도 아주 심오한 뜻이 담긴 어휘(語彙)를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 죽차노(竹茶爐)를 ‘고절군(苦節君)’이라고 칭하였으며 차를 담는 도람(都籃)을 ‘고절군 행성(苦節君 行省)’이라 했다.
한편 다양한 종류의 화차(花茶)가 출현해 생산되었지만 대중적인 상품화(商品化)는 이뤄지지 못한다. 특히 문인들 사이에서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직접 화차를 만들어 마시는 고상한 취미가 유행해 갖가지 화차를 만드는 방법을 다서(茶書)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초 주권(朱權)의 <다보(茶譜)>에는 차에 꽃을 첨가하여 향기\가 배어들게 하는 방법인 ‘훈향다법(熏香茶法)’이나 고원경이 <다보>를 수정보완하면서 연화차(蓮花茶)의 제조법을 상세히 기록한 것도 이런 예이다. 단차의 복잡한 제작과 음용에서 벗어나 화차의 출현과 산차를 우려 마시는 방법은 차의 다양한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차 문화의 전환기인 명대 차의 특징이다.
중국 명차(名茶)는 많은 고사나 전설을 동반하고 있어, 사람들이 끓는 물에 찻잎을 넣어 우려 마시면서 담소를 나눌 때 이러한 고사들은 즐거운 이야기 거리가 되어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중국인들은 차의 명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두어 실제보다는 항상 고상하고 우아하게 표현했다. 여산의 운무차는 주원장이 군대를 주둔시킨 적이 있어 황제가 된 후에 더욱 유명해져 빠르게 확산된다.
명 말에 이르러서는 차를 마시기에 적당한 조건으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며, 마음가짐이 고상하여 뜻과 신념이 일치하는 다객(茶客)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생겨났다. 또한 시로서 차의 흥취를 도와야하고, 다도에 정통해 차의 색ㆍ향ㆍ미를 맛 볼 줄 알아야한다, 다구의 질이 떨어지거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절차가 까다로운 예절이나 접대는 피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차의 금기 사항도 생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