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장에서 보았듯이 값비싼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담아 보시한 것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번이라도 귀담아 듣고 그 가르침을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더 큰 공덕이다. 뒷날 이 마음은 성불(成佛)할 부처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처될 씨앗만 심었을 뿐 부처가 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늘 돌이켜 보지 못한다면 온갖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수행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 근본 뜻을 모르고 글이나 외우고 뜻풀이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선가귀감> 54장에서는 말한다.
看經 若不向自己上做工夫 雖看盡萬藏 猶無益也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서도 마음공부가 익어가지 않는다면 온갖 경전을 다 보았다 할지라도 공부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느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고 기뻐하면 이 가르침은 깨달음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글자를 좀 안다고 하여 자랑을 일삼는 사람, 경을 좀 많이 보았다고 아는 척하고, 잘난 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 교만한 사람이며 자기를 앞세워 시비 분별이 많은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생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부처님 법을 삿된 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도 잘 알지 못하고 어떤 경계에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한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법달 스님도 <법화경>을 삼천 번이나 읽고 외웠으나 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공부에 진전이 없었으니 이런 공부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까지도 불법과 멀어지게 하는 큰 죄업을 지을 수 있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此明遇學 如春禽晝啼 秋蟲夜鳴. 密師云 識字看經 元不證悟 銷文釋義 唯熾貪瞋邪見
어리석은 공부는 마치 화창한 봄날에 새들이 지저귀고 깊은 가을밤에 풀벌레들이 우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밝힌다. 종밀 스님은 “글자나 알고 경만 보는 것으로는 본디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풀어 보는 것은 탐욕이나 성냄, 삿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화창한 봄날에 새들이 지저귀고 깊은 가을밤에 풀벌레들이 우는 것과 같다’라고 번역한 춘금주제(春禽晝啼) 추충야명(秋蟲夜鳴)은 <호법론(護法論)>에서 따온 글로서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경을 보는 모습이 겉으로는 번듯한 자세를 갖추었더라도 안으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면 경전 속에 있는 검은 글자들만 아무 의미 없이 더듬고 있을 뿐이니, 이것이 어찌 아무런 의미 없이 화창한 봄날에 새들이 지저귀고 깊은 가을밤에 풀벌레들이 우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느냐? 비록 경전을 백만 번 읽는다 할지라도 과연 여기에 무슨 이익이 있을 수 있겠느냐[若形留神往 外寂中搖 則尋行數墨而已 何異春禽晝啼 秋蟲夜鳴 雖百萬遍果何益哉]?”라고 되어 있다.
‘글자나 알고 경만 보는 것으로는 본디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풀어 보는 것은 탐욕이나 성냄, 삿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할 뿐이다’라고 풀이된 ‘식자간경원불증오(識字看經 元不證悟) 소문석의유치탐진사견(銷文釋義 唯熾貪瞋邪見)’은 규봉 종밀 스님의 저서 <도서>에서 인용한 것이니 그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만약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면 드러난 가르침에만 집착한 것이니 부처님의 도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찌 있는 자리에서 진리를 드러내 보려 하지 않습니까? 글자나 알고 경만 보는 것으로는 본디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풀어 보는 것은 탐욕이나 성냄, 삿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아난은 부처님의 법문을 많이 듣고 다 외웠지만 오랜 세월 성인의 깨달음에 오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연을 쉬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생멸이 없는 무생(無生)을 증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주는 이익과 중생을 제도하는 방법이 저마다 그 까닭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자만 귀하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若不了自心 但執名敎 欲求佛道者 豈不現見. 識字看經 元不證悟 鎖文釋義 唯熾貪瞋耶. 況阿難 多聞總持 積歲 不登聖果 息緣返照 暫時 卽證無生 卽知 乘敎之益 度人之方 各有其由 不應於文字而貴也].”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을 따라 다니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빼놓지 않고 다 듣고 외웠던 제자가 아난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제자 오백 명이 부처님 말씀을 모아 정리하려고 할 때 처음에 아난은 그 자리에 끼질 못했다. 부처님 말씀을 빠짐없이 다 외우고 있더라도 마음자리의 근본을 모른다 하여 쫓겨난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아난이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가섭을 의지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경전 결집의 최고 우두머리인 그 가섭한테 쫓겨난 것이다. 쫓겨난 아난이었지만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고 잘 생겼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잘 전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법문을 자주 청하였다. 법문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아난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잡하게 되었다.
그때 선정 속에서 오고가는 인연의 흐름을 그대로 알 뿐 분별없이 오직 진실만을 보는 ‘발기’라는 스님이 숲 속에서 공부하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님은 “아난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재미에 속아서 자기 말재주에 빠져 바른 길을 벗어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를 찾아가 게송으로 일러주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 나무 밑에서 / 열반 위해 그 마음을 써야 하느니
아난이여 부지런히 참선을 하라 / 많은 말을 어디에다 갖다 쓸 건가.
[靜處坐樹下 心趣於泥洹 汝禪莫放逸 多說何所爲]
이 게송을 듣고 아난은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태껏 부처님 말씀만 녹음기처럼 외우는 것을 공부 잘하는 것으로 알았던 아난은 정작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아난은 그때부터 열반이 무엇이고 마음자리의 근본이 무엇인지 생사를 걸고 정진하였다. 어느 날 밤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하다 잠시 쉬려고 옆으로 눕는 도중에 홀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서산의 제자 청매(靑梅) 스님도 “마음을 돌이켜 그 근본을 보지 않으면 아무리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라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부처님의 제자라면 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 마음가짐을 단단히 챙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