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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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길잡이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모든 일체를 구멍 없는 구멍에 맡겨 놓아야

새해를 맞이해서


새해를 맞이해서, 묵은 마음들을 털어 내고 자성의 불을 밝혀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불씨를 틔워 주십시오.

올 새해에는 여러분께서 한마음의 도리에 더욱 정진하셔서 가정에 병고 액난이 없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자면 좋은 일도 있고 언짢은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만물의 살림살이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 가정만 그런 게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도 그렇고, 기어 다니는 벌레도 그렇고, 우리 인간도 역시 그렇고, 고통이라는 것은 언제나 뒤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아닌 그 가운데서 내 마음을 발현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 돼야겠죠. 하여튼, 아마도 제가 말을 많이 했다면 많이 했고 안 했다면 안 했을 것입니다. 말하는 대로 없어져 버리면서 다시 생(生)하고, 다시 생하면서 또 없어지곤 합니다.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이 반복 속에서 인간이 됐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문제의 해답을 꼭 푸시길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부터 완성해야 내 골수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돌아가는 게 팔만대장경이니 이 세상을 다 깨달을 수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모든 점에 있어서 통달하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가 없고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린 죽어서도 지금 현재 의식 그 그릇대로 남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만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 만물이 허무가 아니라 무상(無常)이라고 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부서지고 변해지고 죽고, 천차만별로 변화돼 가고 이럽니다. 그것은 허무가 아니라 무상이겠죠.
한마디 언급할 것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천체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이치가 인간 마음의 근본에 가설이 됐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 몸이 혹성이라면 우리 몸속에 있는 그 생명체들은 바로 별성과 같은 거죠. 그러니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색(色)은 공(空)하고, 공한 것은 색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뜻을 아십니까?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해 드렸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까닭은 무엇인지도 수차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름도 없고 겨울도 없는 까닭은 뭐냐고 또 묻고 그랬죠.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까닭 말입니다. 공했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마음으로서, 동방에는 아촉으로 이름을 지어 놓고 서방에는 아미타로 지어 놓고, 사바세계는 관세음으로 지어 놓고 지천국에는 지장으로 지어 놨단 말입니다, 이름을.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게.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천백억화신의 이름이 다 부처님의 마음일진대 어찌 여러분이 그 말만 듣고 이 이름에다가 빌고 저 이름에다가 빌고 그렇게 합니까? 그러다 보니 여러분의 참마음은 발견하지 못하고, 질질질질 끌려가면서도 자기를 완성 못하고 항상 헤매고 있는 이런 실정이죠.
그뿐입니까? 지금 보십시오. 전 세계를 볼 때 전쟁이 일어나고 공해가 심각해져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 것들이 다 욕심이 과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착이 있으면 욕심이 붙고 욕심이 붙으면 일을 저지르는 거죠. 너무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키우는 데도 여러분이 모범이 돼야 하고 또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을 키워야 됩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른다면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빗나가고 그게 뭉치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큰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한마음으로서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고 ‘거기서밖에는 화목하게 할 수 없다. 거기서밖에는 병고를 낫게 할 수 없다. 거기서밖에는 액난을 물리칠 수 없다. 유전을 물리칠 수 없다.’ 하고 믿고 모든 일체를 다 구멍 없는 구멍에 맡겨 놓고 작업을 하실 수 있다면, 그것이 화목을 가져오고 사랑을 가져오고, 이탈을 안 가져오고, 공부 안 하는 애들도 공부를 잘하게 되고, 정신력이 아주 투철해지고, 모든 물리가 터지고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행복이 오는 거죠.
그러니까 새해에는 더욱더 분발해서 앞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도 그렇고 또 병고액난에 휘달리는 것도 그렇고, 항상 말했지만 세균성이나 영계성 또는 유전성 업보성 인과성, 이런 것을 다 여러분이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된다고 봅니다.

부처님은 진짜 계시나요?


스님, 저는 어린이 법회에 다니면서 동생과 싸움도 하지 않고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저를 한번 돌아봐도 선원에 가서 절을 할 때 그냥 할 때도 있지만 마음에서 한두 가지는 꼭 마음을 내거든요.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저의 친구들도 다들 한두 가지씩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절을 하는데 정말 부처님께서는 진짜 계셔서 그것들을 다 듣고 다 이루어 주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냥 앉아서 절만 받으시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스님, 저의 궁금증을 꼭 풀어 주세요, 네!

우리 에너지가 불(佛)이고 불성은 바로 에너지야. 에너지 주장자. 그래서 밤이면 에너지를 조성하고 낮이면 그 조성한 에너지가 쓰이고 이러지. 이게 현실이거든. 우리 어린이가 어려서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모습들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 살겠니? 생각해 봐라. 그런데 단 일 분이라도 어디 앉아서 참 즐겁게 한번 한 발을 떼 놔 봤니? 한 발을 참, 감이 없이, 떼 놓은 사이 없이 떼 놓을 수 있어야만 극락이거든. 그런데 극락이라고 좋다고 할 게 없다 하는 걸 말하고 싶어, 또.
전자에는 부처님 하면 다 그냥 저렇게 앉아 계시는데 참 부처님이 장하시구나! 부처님은 참 좋았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야. 너무도, 어린애들 기를 때 밑 씻어 주고 코 씻어 주고 하면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심부름하는 어른과 같아. 그런데 부처님이 저렇게 앉아 계시기만 하니까 그냥 우습게 생각이 되지. 근데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단다.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 알겠지만, 밤이면 저런 데로 돌아서 이렇게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다시 올라가고 이래도 사람들은 모른다 이거야.
다 깨치면 어떻게 사시나, 다시 재생을 해서 또 나오시나 이러는데, 보니까 재생을 해서 나오시는 게 아니에요. 그냥 찰나찰나 화해서 여러분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시고는 또 화하지. 상대방은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냥 누군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모습이 되지. 그러면 상대방이 모르지. 지팡일 짚고 다리를 질질 끌고 가시다가 어떤 사람이 쓰러져서 있으니까 “아이, 일어나!” 그러면서 다리를 이렇게 이렇게 치니까 그냥 일어났어. “다리 인제 안 아픈가?” 하니까 “안 아픕니다.” “그럼 어서 가. 여기서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얼어 죽어. 얼어 죽진 않아야 공부를 하지.”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돌아서니까 없어졌더라 이거예요.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없어졌느냐는 얘기죠. 그건 화하니까 그렇죠.
그리고 우리 어린이뿐만 아니라 신도님들을 위해서 요거 한마디만 더 하죠. 옛날에 산에서 비구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동짓날이 돼서 팥죽을 쑤게 됐어요. 팥죽을 쑤려고 하니까 불씨가 꺼졌더랍니다. 옛날엔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지 불씨만 꺼트렸다 하면 공사가 벌어지고 야단나죠. 근데 그 불씨를 꺼트려 버렸다 이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눈이 그날 산더미처럼 와서 스님네들이 영 불씨를 얻으러 갈 수도 없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집 안에 들어와서 그냥 굶고들 있는데 나한 방에서 말입니다, 나한이 있는 방에서 제일 조그만 동자 나한이 나갔어요. 나가서 불씨를 얻어 온 겁니다. 불씨를 얻으러 가니까 “아 참, 이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쪼끄만 동자가 왔느냐?” 그러니까 “행자는 스님네가 말씀하시는 대로 항상 그 말씀을 어기지 않고 해야만이 행자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하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불씨를 안 줄 수가 없죠. 그래서 “얘, 추운데 팥죽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 하고 자꾸 권하니까 들어가서 안 먹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방편으로 먹어야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걸 먹는데, 방편으로 먹는 건 똥도 안 누죠? 똥을 만들어서 누면 그건 방편도 아니고 나한도 아니죠.
그래 그렇게 해서 불씨를 얻어 가지곤 갔단 말입니다. 가서 아궁이에다가 불을 내 놓고는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불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 스님네들이 나가 보니까 아궁이에서 불이 활활 타거든요. 그래서 그날 밤에 팥죽을 쑤어 가지고는 배고픈 걸 다 면했죠. 옛날에는 팥죽을 쑤다가 그 맑은 물을 떠서 무명 영가들, 즉 말하자면 사람들만 무명 영가가 아니니까, 무명 영가들을 위해서 다들 끼얹어 주고 그랬는데 그 이듬해 봄이 왔어요.
봄이 와서 주지 스님이 저 아래 마을에 내려가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아니, 동자를 내려보내서 불씨를 얻어 가시더니 왜 불씨를 안 주십니까?” 하더랍니다. 불씨를 얻어 가면 불씨를 꼭 갚아야 되거든요. 왜 불씨를 안 주시냐고 하니까 주지 스님이 “저희는 그런 예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예가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주지 스님이 올라와 가지곤 “너희들 불씨 얻으러 간 예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모두에게 물었어요. 한 사람도 얻으러 간 예가 없더란 얘기지요. 그래서 조그만 도량이니 이거 안 되겠구나! 그러곤 방마다 다 열어서 조사를 했어요. 근데 나한 방 맨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동자 입술에 팥죽이 묻었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서 그 주지 스님은 ‘야! 법이 이렇게 중대하고 이렇게 묘하고 이렇게 광대한 것을 우린 몰랐구나!’ 이럭하고선 그 나한의 입술에 붙은 죽을 씻어 주면서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그러지만 어떠한 일이라도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마음은 너무 많아서 없는 게 마음입니다. 부처도 없는 게 부처죠. 어떻게 있는 게 부처입니까? 부처가 너무 많아서 없는 게 부처다라고 했습니다. 많아서뿐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늘 24시간 살아나가시는 데도 함이 없이 하고 있구나. 우린 여태껏 뛰고 있었는데 뛴 사이가 없구나.’ 하는 겁니다. 뛴 사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묘한 도리로써 사십니까? 오늘 일을 하시는데도 그냥 눈이 이거 보고 저거 보고 조거 보고.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신다면 진짜 내면에 공마당을 크게 만들어 놓고 공치기를 하거든요. 공치기 하면 그 공이 서천국에도 도리천에도 어디든지, 동천이든 북쪽 북두칠성 도량이든지 뭐 어디든지 다 왕래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내 내면에서 공을 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귀찮아서 어떻게 의식을 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길을 가다가 소 눈을 봐도 한 찰나에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런 얘기도 있죠. 어떤 스님이 게을러서 영 일을 안 하다가 소가 됐답니다. 그런데 스님네들이 향나무를 못 얻어서 마루를 못 놓고 있는데 거기에 향나무를 실어다 주고 죽었다고요. 간략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금 재생이 돼 가지고 스님이 됐다고요. 그 입산한 사람이 10년 후에 “아, 내가 어머니 아버지라는 인연을 맺고 다시 안 나와도 될 것을, 다시 안 나오고 자네들을 만나도 될 것을 인연을 맺어서 또 이렇게 서 있는 게 아주 귀찮게 돼 있다.”라고 하더랍니다.
내 모습은 물질계고 모습이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머리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잘들 좀 생각해서 실천해 보시면 살아나가는 데 아주 유익하고 좋을 겁니다.

부끄러움 없는 불자가 되려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다 보면 ‘지심정례공양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이란 대목에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뒤를 이어 진리의 등불을 전해 오신 조사와 종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지식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면서 공양 올립니다.’라고 읊조릴 때마다 그토록 어렵게 구한 도인데 나의 삶은 과연 어떤가 하는 생각 때문에요. 스님, 정말 부처님과 제대선지식께 부끄러움 없는 불제자가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요?

이 도리가 어렵다고 하시지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24시간 살아나가면서 고정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저거 보면 이거 봐야 하고, 이거 들으면 저거 들어야 하고 이 사람 만나면 저 사람 만나야 하고, 이리 가면 저리 가야 하고, 매사 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내가 했다, 내가 살고 있고 내가 망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함이 없이 그냥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데 어떻게 그걸 산다고 하고 했다고 하고 내가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 도리는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호응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 몸뚱이도 없겠죠. 우리는 지수화풍에서 나왔고, 또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아요. 먹고 살고 또 요다음에 갈 땐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니 다 갚는 거지요. 이렇게 정확해요. 하나하나 살아나가는 전부가 말입니다.
이 모습은 물질계입니다. 그리고 볼 수도 쥘 수도 말할 수도 없지만 자기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상 정신계는 자기한테 있단 얘기지요. 그거는 없다 있다를 논의할 필요도 없죠. 그냥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죠. 불성인데 그 불성을 거꾸로 한번 말해 보세요. 성불입니다. 불성을 거꾸로 한번 말해 보시면 성불이에요. 그래서 ‘성불과 불성이 둘이 아니다. 네가 너부터 찾아라. 너부터 믿고 찾는다면 네가 이 자리에 다시 나와서 부모 자식 형제 인연을 짓고 세세생생 고생 안 하고도 훨훨 벗고 자유자재할 수 있느니라.’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응아! 하고 나오면 죽는 날까지 그 기간을 채우려고 살아나가는 겁니다. 죽으러 말입니다. 근데 산다는 것이 죽으러, 기간을 채우러 가는 것이라 한다면, 그 미리 좀 죽으면 어떻습니까? 미리 좀 죽으면, 삶이 없이 산다면, 하는 바가 없이 한다면 어느 누구한테도 고개 뻣뻣이 안 하고 눈 돌리지 않고 항상 자비하고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경에 있는 말씀만 하지 마시고 될 수 있으면 자기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코 자기가 알아야 될 문제, 그것을 아셔서 굴린다면 얼마나 이득이 많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지원 스님이 “보꾹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봇장에 뭘 어떡해? 이 세상에 팔만대장경이 있다 할지라도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만 한다면 만법을 들이고 낸다 하더라도 조금도 걸림이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책이 그 다섯 마디 안에 다 들어 있어. 그러니 그렇게 조성해서 남들이 모두 단 한 줄거리라도 알게끔 해!” 그랬죠.
우리가 밤이면 자죠? 낮이면 깨서 일을 하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자면 와선이고 앉으면 좌선이고, 일을 하고 책을 보면 바로 행선이니라. 이 모두가 선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너희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냥 놔라.” 하셨습니다. 그냥 놓지 못해서, 죽을 때도 이 몸을 바로 벗지 못하고 몇 해씩이나 고생을 하고 똥을 싸고 이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설 거사 얘기 들으셨죠? “그저 난 가야겠다.” 그러면서 앉았다가 그냥 가셨죠. 그러니까 이 껍데기는, 이 모습은 집이에요. 자기 시자면서 집이라고요. 그래서 홀딱 벗어 놓고 ‘너 그동안 잘 살았어. 잘 있어. 예전에 내가 너를 형성시키고 진화시켜서 이렇게 가지고 나온 것은 시자로 쓸 양으로 가지고 나왔는데 인제 너는 다시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야 돼.’ 그러고선 딱 나왔단 말입니다. 또 딸은 딸대로 가죠. 밭에서 일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가 먼저 가셨다니까 안 되겠구나!’ 그러면서 급하니까 그냥 괭이 든 채로 갔단 말입니다. 부인은 김을 매다가 그냥 호미 자루 든 채로 또 갔단 말입니다. 이렇게 벗을 수가 있어야만 우리가 불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뜻으로서의 불제자 말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사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그리고 막막한 미래 등 모든 것이 괴롭습니다. 숨 쉬는 것도 버겁고 힘이 듭니다. 죽으면 끝이 아닌가요?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나요? 정신 차릴 수 있게 한마디만 해 주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자동적으로 한생각에 모든 중용을 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하셔야 될 겁니다. 그런데 관습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괜히 창살 없는 창살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거죠. 그리고 노예처럼 이끌려 가는 거예요. 바람이 이리로 불면 이리로 쓰러지고, 저렇게 불면 저렇게 쓰러지고, 중심을 세우지 못하니까. 예를 든다면 맷돌에 심봉이 꿰어지지 않았으니 맷돌이 이탈될 수밖에요. 물건을 넣어도 갈려져 나오지 않고 정상적으로 돌아가지가 않죠.
우리가 지금 우리 몸뚱이 속에 수많은 인과를 얻어서 인연에 따라서, 인연의 소치로, 자기의 각본대로, 연예인들이 각본대로 연기를 하듯이 그저 속에 든 대로, 자기가 한 대로, 거기서 나오는 대로 지금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 탓입니까.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를 원망할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자기 탓입니다. 남이 나를 못살게 굴다가 죽였다 할지라도 자기 탓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왜? 오히려 그 사람을 수고를 시켰으니까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내 속에 내가 저질러 놓은 그 자체로써 나를 다지기 위한 내 주인공 참 부처님 자성신이, 나를 다지기 위해서 둥글게 쳐 주시는, 그런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그 사람을 수고만 시켰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앞에 닥쳐오는 그 모두를, 내가 죽어 가고 아프고, 병신이 돼 가고 가난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감사하고, 당신은 공했으니까 그저 죽어야 사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왜 죽어야 하느냐. 나는 이런 얘기를 가끔 했죠. 지금도 그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너는 죽어야 나를 볼 수 있느니라.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너를 봤기 때문에 나를 볼 수가 있는 거지, 너로 하여 나를 보는 거지 네가 없다면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네가 없다면, 네 자체의 주장자가 없다면, 나를 똑똑히 볼 수가 없고, 네가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 네 주장자가 따로 없느니라.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길잡이는, 진짜 길잡이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만 여러분한테 고(苦)라는, 업보라는 그 누명을 벗겨 줄 수 있는가. 여러분이 곧이듣고 자꾸 흔들리고 속고 이러지 마시고, 내가 가고 싶으면 그냥 갈 것이고 어떠한 자갈밭이라도, 어떠한 가시밭이라도, 어떠한 낭떠러지라도 서슴없이 떼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라야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나로 인해서 모든 걸 알았기 때문이죠. 내 몸속에 있는 인연에 따라서 모두 회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악의 조건이든 선의 조건이든, 인연에 따라서 내 앞에 온 것이니까 나는 바로 배의 선장이다. 그럼 내 한생각에 이 모든 마음들은 따를 것이다. 그러면 한마음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게 고정된 관념으로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모든 생각에 의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니, 이것은 그 선장 하나마저도 없는 마음, 거기에서 모든 게 가지각색으로 나올 때 여러분은 지금 고정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기서 걸어올 때 뒷발자취가 없듯이, 저 신발 아무렇게나 벗어서 팽개치고 여기 와서 앉으셨듯이, 우리는 금방 사랑하다가도 사랑을 팽개치고 일 보러 가듯이, 일을 하다 금방 팽개치고 또 사랑하듯이, 자식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고, 그렇게 순간순간 만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이렇게 옮겨 놓고 저렇게 옮겨 놓고,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간다 온다도 없이 이렇게 여여하게 그냥 흐르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 산다, 생사에도 끄달리지 마세요.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 이건 들은 얘기입니다마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천도 좀 시켜 주시오.” 하니까 “허, 본래 살아온 게 없다면 죽을 것도 없거니와.” 하고선 그냥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 천도해 달라고 한 사람이 얼마나 무색하겠습니까만 그것은 그 즉시에 요리가 된 것이고 그 즉시에 천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이는 물질 본위만 알지 보이지 않는 50%의 그 영향력은 모르고 사시기 때문에 자유권을 얻지 못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은 행여라도, 누가 이리로 가면 나쁘니 이사를 가지 마라, 부적을 가져라, 또 무슨 고사를 지내라, 뭐 크게 차려 놓고 제사 지내라 이러는 것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런 데 속는다면 여러분은 한시도 벗어날 길이 없을 겁니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갈 것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겁니다. 이사 가는 날도 내가 이날 갔으면 좋겠다 하면 그게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에요. 내가 집을 짓고 싶다 할 때에 거기 지으면 그냥 부처님의 법이니 내가 어디 걸렸다 안 걸렸다 이런 것을 논의하지 마세요. 왜냐고요? 고귀한 보배 속에서 바로 자기 마음이 나오는데 찰나찰나 생각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법음이 아닐까요?
2007-01-08 오전 11: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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