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right}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하여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한다.
첫째, 연꽃이 진흙탕에 있더라도 언제나 맑고 깨끗한 모습이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삿된 소견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처염상정(處染常淨)]. 둘째, 그 씨앗이 진흙탕에 떨어져도 썩지 않고 있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꽃을 피우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귀에 한번 스치기만 해도 없어지지 않고 언젠가는 성불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이다[종자불실(種子不失)]. 셋째, 연꽃이 피면 그 안에 연실(蓮實)이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는 바로 부처님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인과동시(因果同時}]. <선가귀감> 53장에서는 말한다.
聽經 有經耳之緣 隨喜之福. 幻軀有盡 實行不亡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면 법을 알게 되는 인연과 그 법을 따라 기뻐하는 복덕이 있다. 허깨비 같은 이 몸이야 다할 날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없어지지 않느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귀에 한번 스치게 되는 인연이라는 ‘경이지연(經耳之緣)’의 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들으면 그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지면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라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힘이 있어 뒷날 중생의 온갖 고통을 여의게 하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는 부처님 세상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요긴한 길이요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자비로운 반야용선(般若龍船)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따라 기뻐하는 마음 자체가 중생에게는 큰 복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대반열반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에 스치듯 한번 듣기만 해도, 이 인연으로 이 중생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나쁜 업보까지 모두 다 없앨 수 있다[若有衆生 一經耳者 悉能滅除一切諸惡無間罪業]”라고 한 것이다.
‘허깨비 같은 이 몸’이라고 번역한 ‘환구(幻軀)’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중생들의 몸은 알고 보면 무명(無明)의 업(業)으로 이루어진 ‘허깨비와 같은 번뇌덩어리’이다. 이는 허망한 중생의 인연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 인연이 흩어지면 우리 몸은 허공 속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有盡].
중생의 몸에서 근육이나 뼈, 골수 등으로 이루어진 것은 명줄이 끊어져 중생의 인연이 흩어지면 땅으로 돌아갈 것이고, 침이나 콧물, 눈물, 똥오줌과 같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한 기운들로 이루어진 것은 물로 돌아갈 것이다. 따스했던 몸의 열기는 불로 돌아가고, 몸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운들은 허공 속의 바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몸을 만들었던 인연들이 흩어져 땅, 물, 불, 바람의 기운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우리 몸을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땅, 물, 불, 바람의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이 몸은 허망한 것으로 허깨비와 같으니 아끼고 애지중지하여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다. 멀고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마음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때문에 중생들의 생로병사가 생겨났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고 무명 이전의 참마음을 깨닫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이 된다. 진실한 수행으로 나타난 참마음 이것이 영원한 부처님의 세상이니 그 세상은 없어지지 않는다[實行不亡]. <대반야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만약 사람들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이나 법문 또는 그 이름을 얻어 듣고 귀에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이 사람들은 이미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서 공양하며 원력으로 온갖 선근을 심어 왔던 이들이므로 많은 선지식들이 다 거두어 보살펴 줄 것인데, 하물며 경전을 만들고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치대로 사유(思惟)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 법을 설하거나 자신의 역량에 따라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若善男子善女人等 得聞般若波羅蜜多心經典法門名字一經耳者 是善男子善女人等 已於過去無量如來應正等覺 親近供養 發弘誓願 種諸善根 多善知識之所攝受 況能書寫受持讀誦 如理思惟爲他演說 或能隨力如說修行].”
서산 스님은 말한다.
此明智學 如食金剛 勝施七寶. 壽師云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不成 猶蓋人天之福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금강지혜’라는 것을 밝힌다. 금강석을 삼킨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칠보를 보시하는 복덕보다도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스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믿지 않더라도 이미 듣는 자체로 부처의 씨앗이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공부를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뒷날 이 인연으로 부처가 되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나 천상의 복덕보다도 훨씬 더 크다”라고 말한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이르기를 “아주 작더라도 금강석은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나온다. 왜냐하면 금강석은 육신의 더러운 오물들과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작은 씨앗을 심는 것도 이러하여 이 씨앗은 온갖 번뇌를 뚫고 무위열반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아주 작더라도 온갖 번뇌와 더불어 같이 머물 수가 없기 때문이다[譬如丈夫 食少金剛 終竟不消 要穿其身 出在於外 何以故 金剛不與肉身雜穢 而同止故 於如來所 種少善根 亦復如是 要穿一切有爲諸行 煩惱身過 到於無爲究竟智處 何以故 此少善根 不與有爲諸行煩惱而共住故]”라고 하였다.
또한 <금강경>에서도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풀이하여 남에게 일러준 공덕은 값비싼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담아 남에게 보시한 복덕보다도 참으로 커서 그 공덕을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참된 선지식이다. 경전과 선어록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스승으로 섬기고 가까이서 정성껏 모셔야 한다.
설사 지금 이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고 배움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뒷날 이것이 부처의 씨앗이 된다. 이 인연으로 나쁜 길로 가지 않고 세세생생 사람의 몸을 받게 되고, 다음 세상에서는 하나를 듣고도 천 가지를 깨우칠 수 있는 총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 가운데 가장 크고 소중한 인연은 불법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