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푸른 수평선 위로 정해년(丁亥年) 첫날이 밝아온다. 어둠 속에서 밤을 지샌 사람에게 여명은 희망이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과 마주하고 있다. 사위가 깨어나고 온 누리가 밝아진다. 세상이 광명(光明)하다. 눈부신 자비광명(慈悲光明)이 내 안쪽으로도 비쳐든다. 척박한 삶과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선 채로 합장 배례(拜禮)한다. 얼었던 가슴이 녹는 것처럼 마음에 물기가 담긴다.
‘비심(悲心)이 충만하여지이다’를 염원한다. 학생법회 때, 입으로만 외우던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살면서 간절하게 삶의 무게에 와 실린다. 그동안 불교와 만나 많은 위로와 법문을 접했지만 역시 요체는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커다란 발원이 없어진 지금, 나는 남은 생을 갈무리하며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화를 희망한다.
화택(火宅)에서 빗겨난 심정이라고나 할까. 8·15와 6·25, 4·19를 거쳐 숱한 역사의 부침(浮沈)을 보면서 부처님 말씀대로 삼계(三界)는 화택(火宅)이요, 인생은 잠시 잠깐의 꿈 같고 이슬 같다는 무상감을 어쩌지 못한다.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가? 세상과 결별하며 멋지게 손 흔들며 떠나는 이들의 행적을 찾아본 적이 있다. 역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 사람들의 행보가 쾌활하고 시원했다.
죽는 순간 ‘야, 참 좋다’라고 말하며 숨진 독일의 철학자 칸트나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며 자신에 대해 만족해하며 생애를 끝낸 소크라테스의 안심입명이 부럽기도 했다.
한 번뿐인 자신의 생을 완전히 살아 버린다는 주의로 일관했던 천재 작가 괴테. 그는 60년 가까운 세월을 <파우스트>에 매달려 있었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미남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인생의 영욕과 애욕의 무의미 등을 체험한 뒤 다시 인생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그 인생의 의미는 돈이나 명예나 쾌락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힘껏 살아가는 그 고생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두었다. 뒤에 그는 황제의 총사령관으로 요직을 두루 이행한 뒤, 제국의 해변을 봉도 받아 습지를 매립해 낙토(樂土)로 만들려고 온힘을 쏟아 붓는다.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낙토를 만들면서 해일이 덮쳐와도 모두 힘을 합해 기를 쓰고 구멍을 막는다. 백 살이 된 파우스트는 죽는 순간 이렇게 외친다.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누린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또 헤르만 헤세는 그의 대표작 <유리알 유희>에서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했다. 주인공 크네히트는 카스트리엔국(國)의 명인(名人)이 되나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해내고 희생과 봉사로써 최후를 마친다.
소승의 경지인 ‘명인’을 넘어 대승불교의 보살행을 실천한 이타행으로써 인간의 구원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를 졌다. 결국 모든 인간은 무죄다. 그러니 용서를 하고 무죄로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서와 참회와 관용과 사랑으로 인간을 감싸안은 위대한 영혼. 그에게 D. H 로렌스는 ‘죄를 거쳐 예수로’라고 그의 문학정신을 요약했다.
백 마디의 기도보다 무언(無言)의 실천, 한 가지가 유용하고 더 보람있다.
남을 대할 때 자심(慈心)이, 비심(悲心)이 무량해지기를 빈다. 그리고 남을 대할 때 희심(喜心)이 사심(捨心)이 무량해지기를 서원한다.
새해 첫날 저 눈부신 태양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무언가 가슴 골짜기 사이로 축축하게 녹아 버리는 해일(海溢). 나는 다시 그 앞에 반배(半拜)를 드리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