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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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끝)2부 73강 횡설수설의 강의를 마치며…/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불교신문은 ‘신판 대장경’

2년 반의 긴 횡설수설을 어떻게 마감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날벼락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현대불교신문을 폐간하겠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등불 하나가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그리고 사부대중 여러분, 그래도 될까요.

1. 왜 현대불교신문인가
터놓고 물어봅시다. 지금 불교는 어디 있습니까. 불교가 어디에서 시퍼런 생명력을 얻고 있다고 보십니까. 사찰입니까, 서점에 진열된 불교책들입니까, 스님들이 들고 있는 간화 속에 있습니까. 사찰은 다만 경배의 공간이고, 책들은 일방적 훈계이며, 간화는 일초직입의 예외적 말후구(末後句)입니다. 여기 공통되는 것은 ‘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오직 ‘소통’하는 것, 그 현장에만 살아있습니다. 나머지는 다만 이름입니다. 전통은 오직 사람에게서만 살아있고, 사람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입니다.
현대불교신문을 죽이면, 그 소통의 큰 공간 하나가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 다른 신문들이 백가쟁명하고 있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단의 기관지나 특정 사찰의 소식지를 떠나, ‘현대’의 ‘대중’들에게 불교를 일깨우고, 미래를 계몽하고 있는 불교의 신문이 대체 몇 개나 있다고 보십니까?
현대불교신문이었기에 전문가인 저도 턱없이 불교의 문제며, 화두선의 효용 등을 대놓고 시비해도, 그것이 장강의 한 지류, 다양한 방편 속의 하나로 그저 묵묵히 일리로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열린 자세 하나, 결코 작지 않습니다. 불교의 생명은 소통과 관용, 그리고 혁신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 박자를 동시에 갖춘 신문이 어디 여럿 있다고 보십니까? 안타깝습니다. 현대불교신문은 이름 그대로 그 삼박자 혁신의 선두에 있고, 그런 점에서 불교계의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이 자산과 미래를 제발 통촉해주셔야 합니다. 대중들은 이 희망의 불씨 살리기에 촛불 하나라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은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을 위해 인터넷 환경에 엄청난 투자를 해 왔습니다. 다양한 불교의 목소리와 종교간 대화를 주도했으며, 한국불교의 새 길을 열기 위해 과감한 주장과 목소리들을 담아내 왔습니다.
저는 이 가능성이 한마음선원으로 해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원력자인 대행스님은 여성으로서, 보수적 종단에 대해 독자적 혁신을 이룩한 분이십니다. 그런 이력이 현대불교신문 창간과 정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큰 적자를 감수하고 있으면서도 한마음선원이 현대불교신문을 자신의 기관지로 낙착시키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공덕 중의 공덕입니다. 나는 거기서 <금강경>의 말씀처럼, 법을 앞세울 뿐 이름을 따지지 않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큰 원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매주 오는 신문에 대행스님의 법문 두 페이지가 실려 있을 뿐, 한마음선원에 대해 일체의 홍보나 소식이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한마음선원이 신문의 대주주로 재정을 지탱해왔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2. 그런데 지금 그 본래 원력을 접겠다는 소식이 있어 슬픔과 절망이 교차합니다. 왜 인가요. 창간의 그 원력과 정신이 그만 쇠퇴한 것인가요. 저도 모르는 속사정이 있겠지요. 그러나 속사정의 훈습이 사람을 온전히 만나고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하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상(相)에 잡혀 있으면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미래의 비전을 열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도 그의 이력과 경력을 묻지 않고, 현장에서 만난 교감과 소통을 더 중시합니다. 큰일을 다룰수록 친소나 은원을 떠나 비전을 읽고 조직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사회는 왜 폐간 결정을 내렸을까요. 지내놓고 보니 한마음선원의 선전과 홍보에 별 득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좁은 생각이었다면 아예 창간을 않거나 10여년 전에 기조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인데, 하나는 경영부담이 너무 컸거나, 조직과 인력이 잘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둘 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경영의 부담은 합리화를 위해 노력하고, 그도 저도 아니되면 자생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거나, 새로운 인수자를 찾아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그동안 일해 온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또 신문이라는 새 불법 홍포의 귀한 매체를 아끼는 간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신문을 허투루 보지 마십시오.
조직과 인력이 잘 기능하고 있지 않다면, 개선하고 조정해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리더십과 수완에 따라 한 조직은 전혀 다른 얼굴로 개선되고 혁신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없애고 부수는 것이야 누가 못하겠습니까. 현대불교신문의 그동안의 성과와 인지도, 그리고 자원에 주목하고, 그 가능성을 더 발전시켜 나가도록 지혜와 솜씨를 갖출 수 있도록 해 주면, 한국불교의 중심 매체로, 나아가 한국불교의 글로벌화의 첨병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3. 현대불교신문을 폐간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커다란 실수로 판정될 것입니다. 한마음선원에 주는 타격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법보시를 위해 전법을 위해 정재를 아끼지 않더라는 평판이, 수지타산에 맞추어 포교의 장을 닫아버린 세속적 집단이라는 혐의를 받게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갱생과 자력의 여유를 주지 않고, 서둘러 ‘정리’ 절차에 들어갔다는 비난까지 가세하면, 한마음선원은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을 찍혀 받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당할 수 없겠거든,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여유와 최후의 지원은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사람이든 조직이든 처음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중요한 법입니다.
더구나 그동안 일해왔던 식구들이 직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때, 불교의 자원 손실은 둘째치고라도, 가장이요 기둥인 그들이 안을 좌절과 고통을 남의 일로 치부해 둘 것입니까. 굶주린 독수리에게 몸을 찢어내어주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나서서 실천하지는 못할 망정,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제 식구를 궁한 사정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까. 씽크 빅, 생각을 크게 가집시다. 미흡하다면 보완해 나가면 되고, 조직과 운영은 비전에 따라 개선해 나가면 됩니다. 이것은 리더십에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부수기는 쉽지만, 세우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4. 학생이나 부하나 간에 ‘명령’만으로는 사람을 심복시킬 수 없습니다. 명령의 이유와 근거, 그리고 효과와 비전이 납득될 때, 그 명령은 비로소 ‘나의 것’으로 내 힘의 발현으로 추진력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를 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와야 하고, 오랜 준비를 거쳐야 합니다. 뗏목은 버려야 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하물며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려는 분이 계시다면 한사코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두는 문자 밖이 아니라, 그 문자의 도정 속에 있습니다! 옛적 화두가 문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토록 애썼다면, 지금 화두는 문자의 ‘소통’ 속에서 영글어가는 과일이고, 깊어가는 강물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신문’이 바로 그 달라진 불교의 시험장이고 포교장입니다.
신문 없이 불교없습니다. 현대불교신문을 지켜주십시오. 한마음선원 이사진 여러분, 그리고 사부대중 여러분.
2006-12-29 오후 4: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