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절에 들어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모르고 살 때는 스님들이 염불하는 것이 참 싫었다.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어떤 선입관이 생겨 청아한 염불 소리에도 감동보다는 거부감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뒷날 염불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나서는 염불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염불을 권하고 있다. 알고 보니 염불의 내용 하나하나가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큰스님들의 수승한 법문이었기 때문이다. <선가귀감> 52장에서 말한다.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염불이란 무엇인가? 입에 부처님이 있을 때는 부처님만 소리 내어 외운다고 하고, 마음에 있을 때는 부처님을 본다고 한다. 부처님을 부질없이 입으로 외우기만 하고 마음에서 보지 못한다면 도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느니라.
서산 스님은 말한다.
阿彌陀佛六字法門 定出輪廻之捷徑也. 心則緣佛境界 憶持不忘 口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名曰念佛
‘나 무 아 미 타 불’ 여섯 자 법문이야말로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에서 부처님의 세상을 잊지 않고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이처럼 마음과 입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이를 염불이라고 한다.
오조 홍인은 “본디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육조 스님은 “늘 다른 부처님을 생각하면 생사를 면치 못하나 ‘내 본마음’을 지키면 피안에 도달한다” 하고, 또 “자신의 성품에서 부처님을 찾을 일이요 몸 밖에서 찾지 말라” 하며, 또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로써 극락왕생을 구하나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할 뿐이다”라고 하고, 또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제도하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큰스님들은 본디 마음을 바로 가리켰지 따로 다른 방편을 쓰지 않았다.
이치로는 그렇지만 현상으로는 극락세계 아미타불이 확실히 있고 아미타불의 마흔여덟 가지 큰 원력이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열 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면 이 원력의 힘으로 극락왕생하여 바로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삼세제불(三世諸佛)은 똑같이 말씀하셨고 시방세계 보살들도 똑같이 그곳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더구나 또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이 분명하게 전해오고 있으니 모든 수행자는 이 점을 잘못 알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에 힘쓸 일이다.
산스크리트어의 ‘아미타’는 우리말로 ‘헤아릴 수 없이 영원한 생명’이라 하고 또는 ‘헤아릴 수 없이 영원한 빛’이라고 하니, 시방삼세 으뜸가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수행할 당시의 이름은 법장비구인데 세자재왕(世自在王) 부처님 앞에서 마흔여덟 가지 원을 세워 “제가 성불(成佛)할 때 시방세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과 인간 및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조차 내 명호를 기억하고 열 번 소리 내어 부른다면 반드시 저의 국토에 태어날 것입니다. 이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미타참법>에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에서 하나는 더디고 하나는 빠르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나무를 심어 배를 만들려면 더디니 자력에 비유하고, 남의 배를 빌려 바다를 건넌다면 빠르니 그것은 부처님의 힘에 비유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어린애가 큰 불이나 물에 쫓겨 큰 소리로 살려 달라 애절하게 부르짖으면 부모들이 급히 달려와 구해내듯 사람들이 죽을 때 큰 소리로 염불하면 신통갖춘 부처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맞이해 갈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보다 더 지극하고 중생의 생사는 물이나 불의 재앙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이 정토이니 새삼스레 정토에 가서 날 것이 무엇이며,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니 아미타불을 보려고 애쓸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하지만 틀렸다. 저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이 없는데 그럼 나도 탐욕이 없고 성냄도 없단 말인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연화세계로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꾸지만 나는 지어 놓은 업 때문에 늘 지옥에 떨어질까 걱정하는데 더구나 지옥을 연화세계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인가? 저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를 눈앞에서 펼쳐보지만 나는 담 넘어 일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시방세계를 눈앞에서 펼쳐보듯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사람마다 그 성품이 부처라도 행실은 중생이니 그 모습과 쓰임새를 논한다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규봉 스님은 “부처의 이치를 단박에 깨달아도 중생의 행실은 반드시 점차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즉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사람에게 묻노니, 어찌 태어날 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을 수 있고 자연적으로 생긴 아미타불이 있을 수 있겠느냐? 스스로 조금 생각해 보면 어찌 이를 스스로 알 수 없겠느냐? 죽을 때 오는 숨 끊어질 마지막 고통에서 정말 자재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한때 잘난 마음으로 영원히 악도에 떨어질 일을 만들지 말라.
또 마명과 용수도 다 조사스님인데 분명히 가르침을 내려 극락왕생을 간절히 권했거늘 내가 누구라고 극락왕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단 말인가? 부처님께서 친히 “서방극락정토가 여기서 멀리 십만[十惡]팔천리[八邪]나 된다”라고 한 것은 둔한 사람을 위해 현상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서방세계가 여기에서 멀지 않다. 마음이 곧 부처니라” 한 것은 총명한 사람을 위해 근본 성품을 말씀한 것이다. 가르침에는 방편과 실상이 있고 말씀에는 드러난 뜻과 감추어진 뜻이 있으니, 아는 것과 행실이 어울리는 사람은 멀거나 가까운 서방세계 이치에 다 통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생사를 여의고 부처님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다해 부처님 명호를 불러야 한다.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귀로는 똑똑히 들으며 마음에는 부처님 세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생사의 윤회를 끊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