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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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2부 72강 왜 불교인가/한국학중앙연구원
無實無虛, 삶의 역설적 기술

<금강경>은 50회의 횡설수설에도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또 한편 절반의 본문 강좌 곳곳에 <금강경>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불교는 문자와 경전 밖의 불교를 말하지만, 또 한편 충분히 드러내기에, “사구게 하나를 수지독송하라”고 권한다. 이 모순은 문자보다 위대한, 문자를 있게 한 바로 ‘그 삶’이 시킨 일이기 때문이다. 그 뜻을 14장이 요악하고 있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는 법, 이 법은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

무실, 문자는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무실(無實)이 무엇인가. 불교는 경전이나 강의에 있지 않다. 문자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주셔야 한다. 문자가 삶과 접맥되지 못하고 겉돌 때는 차라리 낫다. 문자가 삶을 위한 충실한 노복 혹은 조언자의 역할을 벗어나 주인 행세를 하게 될 때, 생기는 비극은 차라리 문자 없는 세상의 불편함보다 못할 때가 많다.
이 폐해는 너무 많이 듣고 보아 왔다. <장미의 이름>에는 ‘웃음’이라는 불순한 바이러스가 담긴 책의 유포를 막기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근엄한 수도사가 나온다. 조선의 유교, 그 가장 큰 패착은 옛 경전에 담긴 문자를 절대적 권위로 여겨, 현실의 삶의 요구와 변화를 돌아보지 않은데 있다.
기독교와 유교, 이슬람은 자신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자부심이 강하고 넘쳐 ‘노 아더 네임(no other name), 즉 또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으려 한다. 과거의 수많은 종교 전쟁들이 그렇게 생겼고, 지금 운위되는 문명간 충돌도 그 반복과 연장선에 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종교가 없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물론, 기독교와 유교 안에도 ‘말씀이 도구이며, 그런 점에서 상대적일 뿐’이라는 겸손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이들은 곧 이단으로 단죄되어 박해를 받거나 순교했다.
불교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성찰했고, ‘자신의 전통 내부에’ 이 독극물에 대한 해독장치를 해 놓았다. 그 유연성이 불교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내가 길이요,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종교들은 넘쳤으되, “얘야, 나는 다만 강을 건너는 뗏목일 뿐, 나를 우상으로 경배하지 마라”라고 권한 종교는 내가 아는 한 불교가 유일하다. 불교는 인간의 삶을 위해 길을 밝혀 주었으되, 자신이 금박에 봉인되어 신전에 모셔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법은 법이 아니다. 그래서 법이라고 한다.”

삶을 위한 경전
무실(無實)이 어디 경전만에 해당되겠는가. 우리가 ‘전통’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 모두 기실은 ‘이름’에 불과하다. 이름밖의 소식과 만날 때, 이름이 빛을 잃으면서, 동시에 완성되는 법이니, 이름을 지우지 못한 진리는 아직 진리가 아니다.
육조에서 화두선의 발전까지가 늦추잡아 500년, 그로부터 1,000년이 다시 지났다. 갓 쓰고 도포입다가 현대문명의 네온사인 속을 살고, 좁은 반도에서 글로벌한 지구로 영역이 넓혀졌으며, 한문에서 영어로 쓰는 언어까지 바뀌는 21세기, 우리네 삶은 다른 불교를 요청하고 있다. 거기 부응해서 다양한 실험과 접맥, 발굴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더 그럴 것이다.
불교는 21세기 정신문명을 리드할 중심에 있다. 틀림없다. 그러나 이전의 전통 그대로, 그 권위와 자산을 곳간에 두고 있으면 자연 그리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말이다. “티벳에는 승려들만큼의 불교가 있다”는 금언도 불교가 책이 아니라, 사람에 매여 있고, 전통의 묵수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요청에 맞는 재혁신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자면, 과감한 시도들을 해야 한다. 스님들, 불교의 프론티어들에게 내가 늘 요청하는 것이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전통의 ‘실질’은 사람에게서 완성되며, 불교는 삶에 구체적으로 접맥되는 곳에서 활발발(活潑潑), 살아있습니다. 그 지점을 떠난 곳은 모두 이름이고, 허상입니다. 선이 바로 그 일점에 철저하고자 하는 혁신 아니었습니까. 선의 이름으로, 바로 그 정신에 입각하여 선의 전통을 묵수하려는 악착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를 만났을 때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조사들의 뜻입니다.”
선도 화두도 이름이다. “이름 밖에서 어떻게 선을 만나고, 화두를 들 것인가.” 그것이 늘 나의 화두였고, 지금도 그렇다.

이 강좌를 불쏘시개로
여러분들도 그래 주시기 바란다. 각자의 삶이 화두 아닌가. 화두는 삶이고, 불교는 조언이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다면, 조언은 다를 수밖에 없다. 불교는 다만 ‘원론적 조언’을 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 만나는 삶의 곤혹과 곤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로 이들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냐를 가르친다. 핵심은 ‘상(相)의 성찰’이다. 사물에 대한 내 마음의 반응과 접근을 관찰, 조견(照見)할 때, 내 자아가 세상을 분열시키고, 내 이해관계가 세상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 그것 하나이다.
불교는 상(相)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풍부한 노하우를 제공한다. 그것이 불교의 전부이다. 이 이해는 다른 정보와는 달리 존재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에, 특별히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변화는 즉각적이고 심원하게 다가온다. 우선, 자기를 옭죄고 있는 짐이 덜어지고, 막혀있는 사람 사이, 일의 진척에 돌파구가 생긴다. 상(相)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법이 다르다. “내가 문제였다, 미안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내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으니... 완전하지는 않지만, 평심하게 생각해보니 이것이 아무래도 좀 나은 길이지 않겠느냐.” 아, 그러고 보니 누구보다 지금 청와대와 386세대의 정치가 불교를 배웠어야했다.
자신의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때, 일은 좀 더 수월하게 풀릴 수 있고, 자기가 완전하지 않다는 겸손이 사람 사이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된다.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런 태도에 더 큰 신뢰를 두고, 신뢰가 있는 곳에 비경제적인 신비와 기적의 교환이 때로 일어난다. 계산에 밝아야 손해를 보지 않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판단은 특히 생소한 경우, 계산 밖의 비합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수가 많다. 어떤 사안에 얽힌 수많은 사항들, 문제들을 내가 다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거래에 있어 지식뿐만 아니라 교양과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내 경우, 내가 잘 모르는 일이라도,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몇 마디 듣지 않고 수긍하고, 전폭적으로 밀어준다. 사안을 직접 스터디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실패율이 훨씬 적었다. 아니, 거의 실패한 적이 없다. 실패하더라도, 상황 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상(相)을 관찰하고, 상을 덜어내는 일이, 사람들 사이를 좋게 하고, 일을 화엄으로 승화시키는 지혜요 노하우임을 절감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닌가. 너를 비우라는 손해(?)를 강요하는 가르침이 자신과 남을 동시에 요익되게 하는 이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아니 가까운가. 그러니 무허(無虛), 불교의 가르침은 ‘쓸데없거나 손해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종적으로 배워야할 삶의 기술(ars vitae), 그 중심이며 그것의 이익은 그야말로,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받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기술이다.” 누가 불교를 비현실적이라 코웃음치는가.
2006-12-16 오전 11: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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