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삼보(三寶) 사찰이라고 한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여 불보(佛寶)사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긴 목판본 ‘팔만대장경’을 모셨다 하여 법보(法寶)사찰이라 하며, 송광사는 대대로 훌륭한 16국사를 배출했다고 하여 승보(僧寶) 사찰이라 한다.
삼보는 불교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 보물로서,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 그 진리에서 나오는 가르침으로서 법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들을 말하는데 보통 불(佛) 법(法) 승(僧) 삼보라고 한다. 절에서 드리는 예불은 이 삼보를 공경하는 뜻을 드러내고자 두 손 모아 자신을 낮추어 절하는 의식이니 예배라고도 한다. <선가귀감> 51장에서는 예배가 지닌 참뜻을 일러주고 있다.
禮拜者 敬也 伏也, 恭敬眞性 屈伏無明
예배란 공경과 하심의 뜻이 있으니 참성품을 공경하고 하심하여 무명을 없애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분들이 무명을 끊고 자신의 성품을 보아 참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리 처지에서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귀의해야 할 곳이며 공손히 받들어서 잘 모셔야 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는 그 절속에 자신을 낮추는 마음과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이 들어있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은 ‘나’라는 생각으로 시비분별을 일으켰던 마음을 잠재우면 마침내 시비분별의 근원인 미세한 무명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요,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이 담긴 절로써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면 자신의 참성품에 나아갈 수 있다.
옛날 법달(法達) 스님은 일곱 살에 출가해 법화경을 읽고 줄줄 외우면서 다녔다. 하루는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육조 스님을 찾아와 절을 하는데 자만심 때문에 태도도 불손하고 머리가 땅에 닿지도 않았다. 육조는 이 건방진 모습을 꾸짖어 “가르침을 받고자 절을 하면서도 태도가 불손하구나. 공손히 예를 갖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그대 마음속에는 반드시 ‘나’ 잘났다는 어떤 생각이 있을 것이다. 무슨 공부를 해 오고 있느냐?” 묻자, 법달은 “지금까지 법화경을 삼천 번이나 읽었고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우고 다닙니다” 라고 답했다. 육조는 “법화경을 천 번 만 번이나 읽고 외워 뜻을 환히 알고 있더라도 그대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와 더불어 법을 이야기 할 만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법화경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잘났다는 허물’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구나. 나의 게송이나 들어라.
禮本折慢幢 頭奚不至地 有我罪卽生 忘功福無比
절은 본디 아만을 꺾는 것인데 / 어찌하여 머리를 숙이지 않나 /
잘났다는 그 생각이 죄를 만드니 / 나 낮출 때 생겨나는 그 복이 으뜸.
법달은 육조 스님의 가르침에 크게 잘못을 깨달아 참회하며 아만을 떨치고 나서야 법화경의 참뜻을 깨달았다. ‘나’라는 생각이 떨어져야 시비 분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니 아만을 꺾고 하심을 하는 데에는 절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절의 종류는 일곱 가지나 된다.
첫 번째 법달 스님처럼 ‘나 잘났다는 절’이니 공손하지 못한 절이다. 이런 절은 엎드려 절을 해도 불편한 절이 되어 옆에서 보기에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심한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명예를 구하는 절’이니, 교만한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도모하고자 절을 하는 것이다. 요즈음 이름난 명사들처럼 무엇 좀 해보려고 아무 관련도 없는 행사에 일부러 참석하여 절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눈도장을 찍어 뒷날의 이익과 명예를 도모하려는 것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세 번째는 ‘몸과 마음이 공손한 절’이니, 절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공손하여 정중하고 깍듯하게 올리는 절이다.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사람이 즐거우니 곁에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절이다.
네 번째는 ‘지혜로워 맑고 깨끗한 절’이니, 절을 하는 사람이 절 자체가 수행임을 지혜롭게 알고 열심히 절을 하여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것이다. 절을 하고 난 뒤에는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제껏 살아왔던 모습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두루 법계에 들어가는 절’이니, 한 번의 절로써 두루 법계에 계시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이다. 절을 계속 하다보면 절을 하는 중생과 절을 받는 부처님의 마음이 서로 통하여 법계 이치를 통달하게 되는데 이 때는 한 분의 부처님께 절을 해도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절이 된다.
여섯 번째는 ‘올바른 통찰로 정성들여 하는 절’이니, 이 절이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절임을 깊이 깨닫고 지극정성을 들여 하는 절이다. 절을 통해 중생과 부처의 경계가 사라짐을 보면서 자신의 성품에 있는 부처님께 하는 절이다. 일곱 번째는 ‘실상 그 자체가 평등한 절이니, 몸과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절하는 사람의 실상이 ‘텅 빈 충만’이 되어 모든 것이 평등하여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 되는 절이다.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절로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절이니 절 자체가 부처님이요 깨달음이 된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身口意 淸淨則 出世
몸과 입과 뜻이 맑고 깨끗하면 이 세상에 부처님이 나투신다.
절이란 자신을 낮추는 마음과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이 어우러져야 한다. 자신을 낮추어야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고, 상대방을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몸과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고, ‘나’라는 생각이 사라질 때 나를 만들어내는 무명도 없어진다. 무명조차 사라지면 참성품이 드러나니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 세상이다. 곧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성껏 드리는 절 한 번에 우리도 바로 그 자리에서 ‘텅 빈 충만’이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