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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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도 자기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말 한마디에 정을 주고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초심자가 알아야 할 마음 도리


아무리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아직은 알듯 말듯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저 같은 초심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도리에 대해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면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모습이면 누구나가 다 인간이라고 보지만 탈만 인간이지 진짜 인간이 되지 못했을 때는 나중에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나올 수 없는 형편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왜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부처님께서 “네 과거의 모든 걸 모르거든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것, 각본대로 너한테 다가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면 과거에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느니라. 그리고 지금 네가 하고 가는 걸 보면 미래에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느니라. 그런데 누구더러 물어보느냐?” 그러셨거든요.
그것을 한번 잘 음미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거는 과거에 자기가 한 대로, 각본대로 나오는 것이요, 지금 하고 돌아가는 거는 미래의 각본이 되어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주 세밀히 알아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도 저렇게 사는 것도, 돈이 벌리는 것도 안 벌리는 것도 사실 우연이라는 거는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면 참말 어리석고 오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각자 사는 대로, 자기가 하고 있는 대로, 또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각본대로 배역이 주어지는 탤런트처럼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거는, 이렇게 어렵게 인간이 되었는데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고(苦)’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 된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에서 말하듯이 ‘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집(集)’도 붙고 ‘멸(滅)’도 붙고 ‘도(道)’도 붙고 이런 게 다 붙어요. 크고 작은 게 붙고 좋고 언짢은 게 붙고, 언짢은 건 끊어 버리고 좋은 걸 붙게 해도 역시 언짢은 게 또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 자체가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각본대로 받고 있고 또 부딪치고 있는 것도 인간 자체, 생명의 근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말을 한다면 여러 가지 아주 기묘한 이치가,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자주 얘기했지만 이 말은 꼭 하고, 또 한 번 하고 넘어가야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람의 육신 속에 미생물들이 수없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만 그 미생물들이 있기 이전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 여러분을 끌고 다닐 때 어떠한 아귀가 들어오려고 하면 자기의 능력으로 저항력을 발휘해서 필사적으로 버릴 건 버리고 들일 건 들입니다. 그건 왜냐. 자기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돼요. 자기 집이기 때문에 그토록 결사적으로 막는 것이고, 그렇게 침입 못하게끔 하는 그 마음들이 아주 철두철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들을 이끌어 가는, 수십억 마리를 이끌어 가는 대표인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기 위주로 아무렇게나 산다면 거기에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생각을 안 해 줍니다. 일을 하고는 있겠죠. 그러나 ‘에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구태여 우리가 뭐….’ 이런 사람과 똑같죠. ‘구태여 뭐 그렇게 결사적으로 우리 생명을 내걸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뭐 딴 데서 들어오면 들어오고 나가면 나가고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들을 엿볼 수 있는 거죠.
이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라는 게 극히 두렵다면 두렵고 무섭다면 무섭고 자비하다면 자비하고 너그럽다면 너그러운 겁니다. 한마음의 도리라는 것이 그렇게 너그러운가 하면 그것을 또 한 번 뒤집어 본다면 그 체 없는 마음들이 악을 수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겁니다. 악을 수없이 이루어서 그저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닿는 대로 끌어다가 우환을 일으키고 가환을 일으키고 병고를 일으키고 이렇게 합니다.
체험을 해 본 사람은 그걸 알겠지만 체험을 해 보지 못하고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내 팔자야. 왜 내가 이러냐.” 하고선 한탄, 하소연만 하게 됩니다. 한탄하기 이전에 처리할 수 있는 그 원력이 필요한 거지 한탄하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탄을 하다 보면 암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여러 가지 병도 생기는 거죠. 그러니 그게 누구 탓이냐 이겁니다. 전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자기 업보죠. 그걸 과거의 업보라고 하지만 과거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이 마음의 도리, 한마음을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주인공!’ 하면 이름은 주인공이지만 뜻으로 벌써 삼천대천세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마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조상, 부처, 중생 모두, 풀잎 하나, 애벌레 하나 버리지 않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 이 평등 진리의 근본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진짜로 믿을 때에, 바로 주인공 속에 일체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알아야 공(空)한 거를 알고, 공한 거를 알아야 찰나찰나 그냥 발 떼어 놓으면 발 한 발 없어지고, 발 떼어 놓으면 발 한 발 떼어놓은 자국이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으니 내가 없는 그 공한 도리를 한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나침반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어야만 진정한 공부가 시작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듯 어렵게 깨달음의 길에 드신 분들 중에는 일반인의 통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해서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부의 과정을 어떻게 지켜봐야 하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나침반을 얻어 가려면 어떻게 공부하고 넘어가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내가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애를 낳아서 키우듯이 그렇게 키워야 어른이 되죠. 그렇듯이 내가 나를 낳고도, 터득을 했다,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건 발견한 게 아닙니다. 키워져야 발견했다는 뜻이 나오죠. 근본 자체, 그 참자기를 발견했을 때는 그 자기가 지금 현재 자기의 스승이 됩니다. 그런데 스승은 수억겁을 거쳐 나와서 경험이 많아요. 이 몸을 끌고 다니면서 가르치려니까 별짓 다 하는 겁니다. 요거 중요한 얘깁니다. 별짓 다 하는 게 뭐냐 하면 예를 들어 새벽에 쇳송을 할 때 일곱 번을 친다고 적혀 있다면 ‘넌 열두 번을 쳐라.’ 요렇게 바꿔 놓습니다. 또, 한 번을 쳐라 그러면 두 번 치게 하고 두 번 쳐라 하면 한 번 치게 하고, 이렇게 청개구리처럼 가르칩니다. 그럴 때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뜻을 가르치기 위해서고 자기를 다지게 하기 위해서거든요.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혜를 내나, 그걸 보기 위해서 테스트하거든요. 이 마음의 스승이 어떠한 물질로다가 나오는가 하면 꿈에도 보이고 꿈에 말을 해 주기도 하고, 꿈에 좋다 나쁘다 이유가 붙기도 하고 또는 생시에도 나는 지금 저리로 가고 있는데 ‘저리로 가지 말고 이리로 가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마음의 스승이 이리로 가라 하면 이리로 가야 하는 것도 있지마는 내가 오관을 통해서 보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현실에 내가 남한테 창피를 당하는 일이거나 누(累)가 되는 일, 즉 선원에 누가 된다기보다도 불가에 누가 되게 하고 부처님의 용호를 더럽히는 일, 그전에 나의 용호가 먼저 더러워지겠지만, 그러한 일은 하지 말고 또 놓아야죠. 그러니까 “저 사람 미쳤어!” 이런 소릴 듣지 않고 공부하려면 이리로 가라 해도 ‘아, 날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한번 생각하고 놓는 거예요. 그러면 나가다가도 ‘너 지금 이게 아니니까 이렇게 하는 게 옳을 거야.’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옳을 거라는 것도 의미를 모르겠고 영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는데 그 때에도 ‘야, 이게 뭐냐?’ 하고서 거기다 또 놓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쪽 자성불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얻어듣기 위해서 거기다 도로 팽개쳐 놔라 이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수없이 자기를 부딪치게 했고, 수없이 모습 없는 모습들을 나타내면서 자기가 거기에 속지 않고 항복을 받았습니다. 자기라는 건 항복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풀 한 포기도 자기 스승 아닌 게 없느니라. 모두 내 스승이니라. 그것들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공부를 어찌 했을꼬?” 하셨거든요. 또 부처님이 그렇게 그것들을 보고서 깨쳤으니 그들은 부처님을 보고 또 공부를 하거든요. 그러니 어찌 둘이겠습니까?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말씀해 드린 것이니 그렇게들 속지 말고 잘 공부해 나가 보십시오.

어떤 것이 진짜 불교인지요?


어떤 것이 진실한 불교냐 하는 것을 스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불교인지요?

그냥 우리 생활이 불교입니다. 무슨 어느 나라, 이런 거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한 지구 안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불교며 그대로 사는 것이 참선이며 그대로 사는 것이 여여한 것입니다. 그런 걸 모르시니까, 여여한 걸 모르시니까 일후의 그 마음이라. ‘마음을 낸다’ 이런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지만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이걸 썼다 저걸 썼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에서 이렇게 산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에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자식의 노릇을 해 줘야 됩니다. 또 “아버지!” 하고 부르면 또 아버지의 노릇을 해 줘야 되겠죠. “여보!” 하고 부르면 남편 노릇을 해 줘야 하고요. 자동적으로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자동적으로 모든 생활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거를 할 때, 내가 아버지가 됐을 때 내가 했다고 할까요, 또 아들 노릇을 내가 할 때에 ‘내가 아들 노릇을 했으니까 나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여러 가지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 그렇게 자동적으로 많이 했어도 함이 없이 했을 뿐이다 이거죠. 우린 여기 들어올 때에 걸어서 들어오기는 틀림없이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신 분이 있으신가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을 자기 자신들이 하고도 한 게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마음 하나가 잘못됐으면 과거를 외려 붙잡고 간다 이겁니다.
어저께 한 일도 오늘 걱정을 해야 하고 그걸 붙들고 쩔쩔 매고요. 일초 전도 과거니까요. 일초 후도 미래니까요. 그럼 현재만 있느냐. 현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현재도 공했단 얘기죠.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고 현재도 공했으니까 모두 여러분이 할 뿐이지 한 것은 없다 이것입니다. 듣는 것도 하나만 듣고 마는 겁니까? 똑같은 걸 듣습니까? 이걸 듣고 또 딴 것 들어야 하고 또 딴 거 봐야 하고 딴 거를 해야 하고 딴 사람 만나야 하고, 이건 일일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이렇게 작용을 해야 하니까 이것은 얼른 쉽게 말해서 공용(共用)입니다, 공용!
공용인 까닭은 왜냐? 내 오장육부에도 생명체가 천차만별로 들어 있으니까요. 이 몸속에 생명체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어서 의식이 자기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이 모든 의식들이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따라주게끔 만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 인간의 한 모습이 한 세계라고 봐도 됩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크다면 요만하게 좁쌀 알갱이만하게 하나 만들어서 넣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것이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겁니다.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은데다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또 이름이 주어져 있죠. 우리네 세계, 이 지구 하나의 세계가 벌어져 있듯이. 위다 장이다 척수다 척추다 방광이다 장이다 하는 그 이름들이 수효가 없습니다. 다 따지자면 그 수효를 어떻게 일일이 헤아리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 하나면 그 의식이 다 거기에 포함돼서 하나로 작용을 하게 되니까 공용이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 마음이 아파서 관하면 의사가 돼 주고 또 집안이 안돼서 관하면 관세음이 돼 주고, 이 소리는 뭐냐 하면 해결사가 돼 준다 이겁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관하면, 자기 용도에 맞게 관하면 또 보디가드가 돼 주고요. 이거는 천차만별로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것대로 현실로서 그것이 행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이 천만의 말이지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죠. 모든 주처는 자기네들이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주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켰고 자기가 형성됐기 때문에 주처는 자기한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 주처는 뿌리와 같고 자기 모습은 싹과 같은 것이죠. 그러게 싹은 뿌리를 믿고 뿌리는 싹을 돕고 이래야 푸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이 불교라는 것이 이 이름으로만 ‘불교 불교’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단어는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몰라서 나라가 싸우게 되고 분쟁이 일어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모르니깐 그렇다 이 소립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지구를 어느 혹성이, 즉 말하자면 부딪치게 됐다 이런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해결하겠습니까. 이 불교란 너무도 심오하고 너무도 광대해서 무변한 겁니다. 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 혹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혹성이 된다면 그것을 멀리 해서 부딪치지 않게 하는 그런 이유가 있죠.
이 불교라는 것이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의 진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세계나 보이는 물질세계나 모두가 이렇게 합류화해서 서로가 무전통신기로 통신을 하면서, 날아다니는 새나 지렁이도 서로 언어를 통하고 서로 말을 통하고, 무의 세계의 영혼들도 그렇고 이렇게 가는 것이 모두가, 육신이 없어서 우리가 육안으로 보진 못해도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것이 ‘교(敎)’ 입니다, 즉 말하자면. 그래서 이 불교라는 말은 어느 한 군데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전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섭류가 돌아가면서 서로 통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 그것이 바로 진짜 불교가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저희 아이가 이번에 시험을 봤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로서 아이에게 어떠한 삶이 가장 적합한 것인지 모른 채 단지 좋은 대학과 학과에만 매달리게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듭니다. 물론 아이가 원하는 삶이라면 어떤 것이든 이끌어 주고 싶은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겁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도 나에게 가장 올바른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아이들을 이끌어 준다는 것이 참 난감합니다. 스님, 어떻게 해야 아이들의 장래가 밝아질 수 있도록 부모로서 손색이 없이 아이들을 이끌어 줄 수 있을까요?

선(禪)과 학(學)은 둘이 아닙니다. 몸과 자기 불성도 둘이 아닙니다. 콩씨와 콩싹이 둘이 아니듯이 떼려야 뗄 수가 없죠, 그거는. 콩싹이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싹이 없으니까요. 진짜로 ‘아이고, 나는 바빠서 할 사이가 없어서 못합니다.’ 요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그럴 때 보면요, 난 저절로 웃음이 나고 아주 죽겠어요, 그냥. 아니, 세상 살아나가는 게,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게 자기가 태어났으면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자기가 또 콩씨를 만들려고 이렇게 하는 건데, 그러고는 살아나가는데 아이, 글쎄 누가 백일기도를 하랬나요, 누가 삼천 배 절을 하랬나요, 네?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좀 앉아서 ‘주인공(主人空), 너만이 네가 있다는 증명을 해 줄 수 있어.’ 하고 관(觀)하고, 또 여유가 없으면 그냥 서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관하고, 앉으나 서나 변소에 가나, 더럽고 깨끗한 게 불법엔 없으니까 변소에 가나 어딜 가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다 그냥 통하는데 뭐가 바빠서 못합니까, 글쎄. ‘난 참, 아이 바빠서.’ 하고 이렇게 모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만 끄달리던 분들도 안으로 관하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그렇게.
그러니 여러분은 진짜 내가 있으니깐 모두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고, ‘콩씨와 콩싹은 떼려야 뗄 수가 없구나.’ 하는 걸 생각하시고, 또 자손들도 그렇습니다. 업으로 자손을 낳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원수로 자식이 생기는 수도 있고 또 선업으로 자식이 생기는 일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그 자식이라는 게. 그렇다면, 자손들도 원수로 태어났다면 말도 못하게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또 선업으로 태어났다면 그 가슴에 그렇게 좋은 결과를 주어서 흥락하게 만듭니다. 또 원수가 아니고 업장으로다가 만났다 이런다 하면, 극하게 그렇게 나가서 그냥 온통 그 속을 썩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녹이려면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때려도 아니 됩니다. 말로 한다면 오히려 더 빗나가요. 아주 듣기도 싫어하고요. 그리고 만약에 때렸다 하면 ‘아이, 요놈 때렸어!’ 하곤 그냥 또 나가죠. 여러분도 참 경험 많이 하실 겁니다. 그런데 요거를 녹이는 방법이 어떤 거냐. ‘업장이 생기게 한 것도 너고 업장이 안 생기게 한 것도 너고 그러니까 나는 더불어 같이 공(空)했어. 나는 내가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저지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너만이 해결을 할 수 있어.’ 그러곤 그냥 딱 거기다가 맡겨 놓고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겁니다. 개미도 나가서 자기가 배가 고프면 먹을 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나갔는데 자기 살 궁리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들을 위하고 부모를 위한다 하더라도 자유스럽게 놔두고 행해야지, 말로나 행동으로 억압하고 이렇게 한다면 마음이 넓어지려야 넓어질 수가 없습니다. 가만 내버려두세요. 저 산천초목의 모든 푸름도 가만히 보세요. 제 이파리가 져서 떨어지고 져서 떨어지는 것이 거름이 됩니다. 그런데 또 거기서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오히려 망가뜨려 놓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것도 망가뜨린다고만 할 수도 없죠. 잘못되고 잘되는 것은 물 흐름에 의해서 돌아가는 거니까요. 말하자면 마음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마음 떠나서는 계발할 수 없고 마음 떠나서는 원력을 세울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밉다 곱다를 떠나서, 또는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또는 자식이 잘못한다 잘한다를 떠나서, 또 자식을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는데 억지로 부모 뜻대로 강요해서 자식들의 마음을 버려놔 가지고 그르치게 만들거나 또 죽게 만들거나 병들게 만들거나 이런 법이 없도록 여러분께서 극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또 한편으로는 돈을 많이 줘서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몰라요, 귀한 거를 모르고. 얼마나 어렵게 돈을 벌어서 사는지 그런 걸 또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마구 사는 거죠. 그러면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을 주는 것도 너무 적게 줘도 안 되고 너무 많이 줘도 안 된다 이겁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으로 그렇게 같이 불이 들어오게, 항상 같이 들어오게 하십시오. 한 방에서 같이 사는 식구인데 착이라고 할 건 없지만 어찌 사랑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진짜 사랑을 하려면 ‘너의 주인공과 내 주인공이 둘이 아니거늘 어찌 너한테는 불이 안 켜지랴. 다 한마음으로, 밝은 마음으로 대치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주인공 바로 너뿐이 아니냐.’ 하고 자꾸 관해 준다면 나갔던 놈도 그냥 기를 쓰고 들어올 겁니다, 아마. 이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금 자식들이 잘못한다 어쩐다 하지 말고 여러분이 참으로 자식들을 위한다면, 위하는 게 돈을 많이 주고 잘 입히고 잘 먹여서가 아니라 내 말 한마디에 정을 주고 말 한마디에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말 한마디 생각 하나를 잘할 수 있다면 이탈을 하지 않고 모든 자손들이 한마음 한뜻이 돼서 화목하게 살 수 있고, 또 사회도 문란하게 어지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2006-12-11 오전 11: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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