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초원(草原)을 누비며 양을 치고 말을 타던 몽골인은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나라를 세웠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수도를 몽골고원에서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원(元, 1271~1368)이라 하였다. 원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복합 사회를 구성하여 4단계로 민족을 구분해 몽골인들만이 귀족 지배층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 외에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남인(南人)들로 나누어져 신분을 차별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송 문화와 비교하여 낮은 문화수준의 몽골인들은 다른 민족의 종교ㆍ풍습에는 관용적이었지만, 다른 민족의 문화ㆍ사상과는 서로 충돌되는 면이 있었다. 특히 한인과 남인들은 몽골인들의 멸시 속에서 더 이상 고상한 취미나 풍류를 표현할 의지를 잃었다.
송나라 문인들은 차(茶)를 통해 자기의 이상과 절개를 표현했고 그들의 뜻을 연마(硏磨)했다. 즉 몽골 귀족의 압박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차로 풀었다. 거칠고 호탕한 성품의 몽골인들은 차를 생명처럼 여기고 좋아했지만, 차를 끓이고, 품평하고, 고상한 정취를 즐기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원대에는 여러 형태의 음차(飮茶) 문화가 성행하게 된다.
송대 유행했던 단차(團茶)는 여전히 보존되었지만 수량이 크게 줄어 궁정에서만 마셨다. 투차(鬪茶)법을 보전하는 정도의 비교적 쉽고 간단한 형태의 말차(沫茶)를 만드는 방법만이 유지된다.
당시에는 차에 호두ㆍ잣ㆍ깨ㆍ은행ㆍ밤 등을 넣어 마시는 것이 유행했다. 호북과 호남 등에서는 청두(靑豆)를, 북방에서는 대추를 넣어 마셨다. 이렇게 먹는 방법은 차의 정미(精味)는 잃었으나 민간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문인들도 즐겨 마셨다. 이러한 음다법은 북방민족에게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원대 모차(毛茶)의 유풍이다. 호두와 잣을 쌀가루와 합하여 돌 같은 작은 알맹이를 만들어 손님이 오면 차에 이것을 넣어 마시는 형태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차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산차(散茶)의 출현이다. 오늘날 찻잎을 우려 마시는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당시에는 연한 싹을 따고 풋내(靑氣)를 제거한 후에 차를 끓여 마셨다. 이러한 방법은 실제로 민간의 음차에서 나타난 것이다.
음차 방법의 간소화에 따라 차 문화는 두 종류의 유형으로 나타났으며 차를 마시는 것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과 민속ㆍ가례와 결합됐다. 다른 하나는 자연으로 돌아가 차와 자신을 자연 속에 용해하여 도가의 자연합일(自然合一) 사상을 이루어 내려고 하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다도 사상은 조원이 그린 <육우 품차도(陸羽 品茶圖)>로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다선(茶仙)인 육우를 그려 원대 차인(茶人)의 이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 속에 먼 산과 가까운 물ㆍ고목ㆍ초가집이 완전하게 어우러진 세계를 구성하여 소박(素朴)한 신선의 경지를 표현 하고자 했다. 이것은 원대 차인들이 비록 역경에 처해 있지만 가슴 속에는 원대한 품격과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원대 차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송대에 번창했던 정교하고 번잡한 다예(茶藝)의 형식을 벗어나 간소화 되었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면 전통적 차문화 형식은 쇄락하고 사상도 없어지는 듯 했지만, 차는 각 계층 사람들에게 깊이 침투해 새로운 문화로 발전됐다. 당(唐)이래 단차 중심의 음차문화가 명대의 완전한 산차(散茶) 시대로 변화하는 기반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