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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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논쟁이 때로는 약이 될 수 있다/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첫째, 논쟁은 구술(口述)로 해야 한다. 둘째, 논쟁의 내용을 양측에서 기록한 다음, 기록자는 자신의 서명을 한 뒤 대담자에게 그 기록문의 인정 서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대담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명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중략) 다섯째,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 그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필히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론해야 한다. (중략) 여덟째, 양측 어느 쪽도 논쟁 중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책임져야 한다. 아홉째,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을 기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파아나두라 대논쟁> (석오진 편역, 운주사)에서 인용 참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8월 하순의 스리랑카.
서해안에 자리 잡은 고요한 섬마을 파아나두라에 난데없이 1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군중들의 앞자리에는 스리랑카의 스님들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유럽의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와 기독교가 한판 붙어보자고 모인 자리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인 1873년 당시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였습니다.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지배권을 물려받고서 모든 분야에서 수탈이 자행되었는데 특히나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로 규정짓고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교인 불교에 대해서도 엄청난 탄압이 가해졌습니다. 스님들은 분개하였고 결국 공개토론을 제안하였습니다. 세 차례의 논쟁이 벌어진 뒤 마지막으로 1873년 8월26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다시 한 번 논쟁은 벌어졌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미신을 숭배하는 무리들’에 비해 자신만만한 강대국 목사들의 기세는 말할 것도 없이 스님들의 패배를 짐작케 합니다. 하지만 두 종교의 대표자들은 위의 원칙에 의거해 논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상대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표명을 조목조목 따지되 그것을 글로 적어서 기록에 남겼습니다.
논쟁이 끝난 뒤 불교와 기독교 양측은 서로 자기들의 승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그 논쟁의 승리는 불교 측의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논쟁의 여파가 흥미롭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와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불교를 알아보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인 육군대령 울코트는 아예 불교에 귀의하고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매우 활발한 불교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주목할 만합니다.
35살의 청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고 초전법륜 이후 향한 곳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바라문 가섭 삼형제의 처소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백세를 훌쩍 넘겼으니 나이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거느린 제자들로 보나 ‘새파란 청년’ 붓다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과감히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들의 교리와 종교의례에 대한 오류와 맹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가섭 삼형제는 청년 붓다에게 귀의하였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 또한 부처님의 위력을 절감하고 독실한 제자가 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요즘 부쩍 ‘대화’하고 ‘화해’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급적 논쟁은 피하자고 합니다만 과연 논쟁 없이 이루어지는 대화가 얼마나 진실한지는 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이 있어야만 상대 종교를 알려고 머리와 가슴을 열 것이요, 양식 있는 종교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 종교가 무엇인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망언을 하는 바람에 전 세계 무슬림들의 맹비난을 받자 일종의 화해의 몸짓인 듯 인구 99%가 무슬림인 터키를 방문하였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짚지 않고 슬쩍 넘어가려는 교황의 몸짓에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눈빛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원탁토론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교황이 흔쾌히 승낙했으면 좋을 텐데 싶습니다.
2006-12-11 오전 11: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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