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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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부 71강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14/한국학중앙연구원
체루비읍, 법문 듣고 뜨겁게 울다

13장으로 <금강경>의 또 한번의 연주가 끝났다. 변주는 이번에도 핵심의 주 노트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주(住), 즉 심리적 토대 없이 사는 법을 연습하라.”
저 너머 초월이며 절대선의 얼굴을 하고 있는 토대는 팍팍한 우리네 일상에 한 모금 청량수나 든든한 안전판 같아 보이지만, 실상 위태롭기 한량없고 부수기는 더더욱 어렵다. <금강경>은 이 초월적 토대에 기대려는 오래된 유혹을 타파하는 충격 장치이다. 그래서 왈, ‘소승’이 아니라 ‘대승’이며, ‘최상승’이라고 불렀다.
백척간도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30미터 높이의 장대끝에서 발을 내딛으면 죽을 것같지만, 그러나 어디도 의지하지 않는 힘과 믿음을 갖게 될 때 그때 돈교, ‘자기 안의 신비한 힘의 원천’이 빛을 밝히고, 힘을 들이부어주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만해 <님의 침묵> 또한 그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제 14장, 수보리의 감격
14장의 첫 머리는 “어디에도 기대지 말라”는 이 ‘아득한’ 소식에 절망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된 사람의 위대한(稀有) 통곡이 소개된다.
“이때 수보리가 이 경전을 듣고, 그 깊디깊은 소식을 이해하고는, 체루비읍(涕淚悲泣),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부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께서 이토록 깊은 경전을 설하셨으되, 그동안 제가 익힌 지혜로는 이 경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爾時,須菩提聞說是經,深解義趣,涕淚悲泣,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我從昔來所得慧眼,未曾得聞如是之經)
수보리는 드디어 부처의 반복되는 변주 안에서 집요하게 반복되는 가르침의 키노트를 체회(體會), 온 몸으로 승인했다. 통곡으로 가르침은 완성되었다. 슬퍼도 울지만, 기뻐도 운다.
여담이지만, 내게 경전의 이해는 전광석화, 혹은 쩡하니 얼음물을 깨듯 오기보다, 물에 젖듯 오래 스며들어 왔다. 아직도 그 침침연(浸浸然), 스며듬은 계속되고 있다. 경전의 내용은 첫 대면에서는 삶의 실감과 바로 스파크되지 않는다. 낮선 문자에, 낯선 어법, 이국의 정취가 더해져 그저 신비로만, 저너머의 희유한 자에게만 열려 있는 예외적 축복으로 느껴질 뿐이다.
조금씩 문자의 의미가 집히고, 주석들과 일상의 사례들이 이 낯선 문자들과 손을 잡아 나간다. 이 악수가 확고해질수록 <금강경>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을 얻는다. 한편 적응과 이해의 기쁨이 자라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배반과 좌절도 시시때때 몰아친다. 그렇지 않은가. 재적응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며, 경전과 삶은 어느 수준에서 화해하고 일체감을 얻는다. 수용과 배제의 경계가 분명해지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다.

깊어가는 강물
어쨌거나 삶이 세월과 더불어 징해지는 것이라면, 깨달음 또한 그처럼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는 어떤 것이다.
책의 이해 또한 그렇다. 삶과 더불어 책의 의미는 더 떨리고 살을 헤집으며 나를 파고든다. 말의 무게가 달라지고, 거기 자기만의 색깔과 표정을 얻게 된다. 그 ‘구체화’가 없거나 미약하다면 그것은 아직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옛 어른들은 이 생경한 동거를, “책은 책이고 나는 여전히 나일 뿐(書自書, 我自我)”이라고 혀를 찼다.
<금강경>의 수지독송도 그렇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 가장 흔히 독송되는 경전이 이 ‘길들이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입끝에만 맴돌면,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일 뿐 아니겠는가. 오래 읽고 하다보면, 사구게 한 둘이 입에 붙고, 일마다 문득 문득 그 가르침이 머리 속에 떠오르다가, 눈 앞을 가리다가, 사람 얼굴에 나붙게 된다.
언성을 높이거나, 울컥하는 일이 있거나, 주먹이 올라가다가도, 돈을 따지거나, 명예를 계산할 때, 문득 ‘아상’이며, ‘복덕’이며, ‘마음의 항복’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이 떠오른다. 그 떠올림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어느덧 인격이 된다. 그 인격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경전의 사구게는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심원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금강경>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이 경전의 사구게 하나를 수지독송하는 공덕만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
<금강경> 14장의 내용은 길다. 좀 불경스럽지만 내용을 요약해 드린다.
1. 감격의 통곡이 있고, 수보리는 우려를 표명한다. 이 법문을 “나, 수보리는 이해하겠으나, 다음 세대, 말세의 중생들이 알아먹겠습니까” 하고서, 이어 “만일, 이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정말 희유한 통찰력의 소유자” (若復有人,得聞是經,不驚 不怖 不畏,當知是人,甚爲希有)라고 찬탄하기도 한다.
2. 이어, 변주 하나가 삽입된다. “반야바라밀을 얻은 사람은 상(相)을 떠났으므로, 신체가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분노, 저주의 념에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 자기염려로서의 상(相)을 떠난 인욕바라밀의 이 위대한 행동을 예시하고 나서 수보리는 하고 싶었던 말을 아퀴짓는다. “그래서 수보리야, 마땅히 일체의 상(相)을 떠나야 한다. 그런 다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휘해야 한다” (須菩提, 菩薩應離一切相,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3.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관인 상(相)을 여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에 토대를 두지 않고, 무소주심(無所住心), 즉 토대없는 마음을 낼 것” (不應住色生心,不應住聲香味觸 法生心,應生無所住心)이며, 이를 실천하는 위대한 실천자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利益)되게 하기 위해 토대없는 보시를 실천한다.” (菩薩爲利益一切衆生故,應如是布施)
하나 유의할 것이 있다. 지금 ‘중생’이라고 썼지만 보살은 ‘중생’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고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역설이다. 중생을 요익(饒益)시키는 삶을 살아야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의식 속에서, “저는 중생, 나는 그를 위해 시혜를 베푸는 보살”이라는 추한 의식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 이것이 <금강경> 전편을 통해 반복되는 경고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여래가 말하는 일체중생은 그러나 중생이 아니다.” (如來說一切諸相,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

어둠 속에 갇힌다
<금강경> 14장은 이어진다.
4. “만일 보살이 대상(法)을 의식(住)하고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같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고, 보살이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그는 밝은 대낮에 눈을 뜬 것과 같아 수많은 사물을 환하게 볼 수 있다.” (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若菩薩心不住法而行布施, 如人有目日光明照, 見種種色)
이 역설 하나를 제발 깊이 새겨두셔야 한다. 눈앞의 이익에 잡히면, 자기 본 바와 국량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적절한 조처를 잃는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가 꼭 그렇다. 내가 늘 새기는 영화 <대부>의 명 대사가 있다. 아버지 말론 브란도가 후계 아들 알 파치노에게 말한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을 그르친다.”
2006-12-11 오전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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