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봉암사에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강의할 일이 있어 갔다가 근처 토굴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사는 한 스님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십수 년 화두 하나만 들고 살아가는 순수한 납자이기에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물었다. “스님, 제가 참선을 하다 공부가 안 되면 전생의 업장이 많다고 생각되어 그 업장을 없애려고 ‘예불대참회문’으로 참회하는 절을 하면서 목탁도 내리고 능엄주 주력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선방에서 가깝게 지내던 스님들이 찾아와 이런 저를 보더니 기도하는 스님이라고 서로 쑥덕거리면서 외면하고 멀리 하는 것 같습니다. 저와 아주 친하던 스님들까지 저를 외도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언짢습니다. 은사스님께 배운 대로 공부하고 있는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과 주력 의미를 그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알고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회하는 절과 주력이 참선이 되고, 참선이 절과 주력이 되는 도리를 모른다면 그 사람들이 잘못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가귀감> 50장에서 말한다.
持呪者 現業 易制 自行可違 宿業難除 必借神力
주력을 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금생에 지은 눈에 보이는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워서 자기 힘으로 고칠 수 있지만, 전생의 업은 깊이 뿌리박혀 쉽게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주력의 신비한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呪)는 주문을 말하니 범어 mantra를 번역한 것이다. 신주(神呪), 비밀주(秘密呪), 다라니(陀羅尼),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며, 음역은 만다라(曼茶羅)이다. 이 주문 안에는 모든 불보살이 사바세계 온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담겨 있어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뜻이 숨어 있으므로 이 주문의 참뜻은 범부들이 함부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한다. 주문에 들어있는 미묘한 뜻과 신비한 힘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중생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신주’ 또는 ‘비밀주’라고 하고, 또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다라니[總持]’라고 하며, 이 주문은 참되어 거짓이 없는 말이라는 뜻으로 ‘진언’이라 말하기도 한다. ‘주(呪)’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뜻을 어떤 각도에서 풀이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질 뿐 그 근본 바탕은 같다. 이 부처님의 모든 공덕이 담겨 있는 주문을 정성껏 외움으로써 생기는 힘을 주력이라 한다. 이 주력을 통해 많은 장애를 제거하여 성불할 수 있고 뜻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중생의 업은 전생의 업과 금생의 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금생에 지은 업은 눈앞에 있어 자신이 바로 알 수 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금방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전생에 지은 업은 없애고 싶어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 뿌리가 깊으므로 마음대로 없애지를 못한다. 그 영향으로 올바르게 살고 싶어도 삿된 곳으로 떨어지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더러운 곳에 물들며 덕을 쌓아도 박복한 일만 생긴다.
착한 일을 해도 집안에 흉한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재난이 닥치며 살생을 하지 않았는데도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다. 이런 일은 전생의 업보가 아니면 금생의 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주력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摩登得果 信不誣矣. 故 不持神呪 遠離魔事者 無有是處
마등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진실로 속이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주(神呪)를 지니지 않고 마군의 장애를 멀리 벗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능엄경>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마등녀는 천한 종족의 아리따운 딸인데 어느 날 탁발 나온 잘 생긴 아난존자를 보고는 첫눈에 반하였다. 마등녀는 사악한 주문으로 아난을 유혹하려고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 사실을 아시고는 정수리에서 오색 광명을 놓으시니 그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꽃들이 떠오르고 연꽃마다 부처님의 화신이 앉아 계시면서 ‘능엄신주’를 말씀하시고는 문수보살에게 그 신주를 가지고 아난을 구해오라고 명하였다. 그 신주를 외워 마등녀의 사악한 주문이 소멸되자 문수보살은 아난과 마등녀를 데리고 부처님 처소로 돌아왔다. 마등녀는 전생의 업장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출가하여 이 신주의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주력을 하는 법은 <능엄경>에 나오는 ‘대불정능엄신주’이든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든 ‘옴 마니 반메 훔’이나 법신 진언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든 어떤 신주라도 그 뜻을 헤아려서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 한 뜻으로 열심히 외워 그 주문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주문을 외우는 것도 화두 드는 법과 비슷하다. 말길이나 뜻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문속에 들어가 주문과 하나가 되면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 주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가 ‘주문’이 되고 ‘주문’이 ‘나’가 되어 주객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객의 경계가 사라짐은 모든 시비 분별이 끊어지는 것이고, 시비 분별이 모두 끊어짐은 시비 분별에서 오는 온갖 번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온갖 번뇌가 텅 빈 자리에서 빛으로 충만한 부처님의 세상이 나타나니, 여기에서 부처님의 신통력이 드러난다. 이 신통력으로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전생의 업장이 빠르게 소멸된다. 너무 미세하고 뿌리 깊게 숨어 있어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전생의 무거운 업장을 단숨에 없애 버린다. 마군의 장애와 같은 전생의 업장을 남김없이 녹여버리니, 이와 같이 신주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공덕과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신주를 지니지 않고 마군의 장애를 멀리 벗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한다.
간화선이 더 좋고 주력은 보잘 것 없다 시비할 것이 아니라 주력 하나만 제대로 알고 수행해도 전생의 업장을 벗어나 지금 부처님 세상처럼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