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열린 조계종 제3차 간화선 세미나에서 조명제 박사(부산대 강사)는 ‘간화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제하면서 고려 ㆍ중국 송대ㆍ일본ㆍ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간화선과 사회적 관계에 대해 진단하고, 전근대 동아시아 간화선의 역사적ㆍ사상적 한계와 불교 근대화의 과제와 조계종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이에 대해 이상호씨(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는 조명제 박사의 발제 내용에 몇 가지 문제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며 이에 대한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편집자주>
조명제 박사의 논문(이하 논자)은 중국 송대, 고려,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간화선과 사회적 관계에 대하여 깊은 고찰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논문은 지금 이 시대의 간화선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도 시의 적절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 노고에 우선 감사 말씀 드린다.
논문의 전반부에서 남송의 임제종 선승들이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표방한 국가의식, 민족의식이 고려, 일본, 베트남의 역사에서 13세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고려와 일본의 선사상은 유학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거나 그 일치를 주장한다고 말하고 결국 선불교가 갖고 있는 현실적 사회적사상의 한계성은 주자학에 의하여 극복되고 선불교는 몰락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간화선의 발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밝힌다.
첫째, 간화선의 주변에서 일어난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한다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사실 또는 사건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은 매우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사상은 사회적 현상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을 통하여 그 사상에 대한 접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사상체계를 전제로 한다. 간화선은 처음에 사상체계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간화선의 사상에 대하여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선 일정한 사상체계부터 내세워야 할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 학계나 수행현장의 일선에서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기보다는 현재 진행형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논문에서 간화선을 수행방법론적 측면에서 벗어나 논하고자 밝히고서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정한 사상체계의 제시없이 말한다면 그 기준을 세울 수 없어 서로가 타협하고 합의를 이끌어나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둘째, 문제제기와 간화선에 대한 비판으로 끝내고, 뿐만 아니라 그 답을 간화선에게 요구할 뿐 간화선의 사회화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더욱이 그 비판은 간화선 그 자체의 근본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간화선 수행자(대혜포함)들의 사회정치적 관계를 들어 간화선의 비판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기에 간화선 수행자와 간화선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간화선의 왜곡이 보이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시도가 문제제기로써 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간화선을 살려서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간화선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입하자는 취지로 보이기 때문에 간화선의 사회화를 주창하는 이 시점에서 우려스러운 것이다.
셋째, 간화선을 정치적 관계 속에서 승가와 사대부와 같이 특정 집단의 성격에 맞추어 논의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관점은 간화선의 사회화와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우선 사회화나 대중화라는 것은 특정 집단이나 신분에 국한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범인류적 측면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간화선이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토대로 그것이 사회적 현상 속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고찰해야 할 것이다.
조명제 박사는 사회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서 주체의 내면적 심리적 전환이 직관적 세계의 변혁과 결부시키는 것은 현실순응적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로서 통용될 수는 없다.
사회의 변혁은 어디까지나 개개의 인간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도 존중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불교가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간화선의 사회화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이미 부정한 것을 들어 다시 논의하게 되는 것이므로 쓸데없는 일이 된다.
뿐만 아니라 만약 한 인간의 변화가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기 힘들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한 인간의 변화를 무시하고서 사회의 변화를 논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근거로 논할 일이 아니라 다른 학문분야에서 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간화선의 사회화에 대한 논의는 간화선 그 자체에서 사회적 사상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간화선을 통하여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넷째, 선불교가 엄연히 한국불교계에서 현재진행중인 사실을 무시하고 선불교의 몰락을 전제로 말하는 것은 이미 사실에 근거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 현재 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지 않는 한 그것은 왜곡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간화선은 무엇보다 명징하게 사회적 현상을 꿰뚫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간화선은 막힌 곳에서 활로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로써 사회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간화선이 처음 생겨난 송대 이후 동남아 각국에서 사회정치적 변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본정신은 당대의 시공을 초월하여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엄연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주창자의 근본적인 의도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몸은 같은 몸이지만 옛것을 버리고 지금의 옷을 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간화선의 사회화 혹은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