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섭리가 우주 섭리와 더불어 같이 돌아간다
오늘은 우주의 섭리나 태양의 섭리나 별성의 섭리가 인간의 혹성의 섭리와 똑같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거론할까 합니다.
태양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태양이, 아무리 태양이 광대무변하게 비춰준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티끌 같은, 한 개의 촛불 같은, 그런 조그마한 한 티끌의 불씨 자체보다는 못하다는 얘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온 누리를 태양보다도 더 깊고 무변하게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땅 속이나 물 속이나 어디 아니 미치는 데가 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태양의 근본도 바로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우주의 근본이 전체 한데 합쳐서 한마음의 근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번 태양계의 뜻을 살펴봅시다. 지난번에는 지구에 관한 건을 잠깐 거론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태양의 문제를 볼 때에 거기에도 오장육부가 있고 삼계(三界)의 뜻을 가지고서 우리는 활력성 있게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태양의 그 근본 자체가, 그 중심이 삼각으로 원형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태양은 근본적으로 그 안을 본다면 차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불덩이 같으니까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불덩어린 줄 아시는데, 그렇게 아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속에 찬 게 없으면 더운 것이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또 안이 뜨겁다면 바로 바깥으로 찬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맥 동맥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몸을 통해서 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 개가 뚱그렇게 있다면 양면으로 다 자극을 줍니다. 자극을 주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접착풀이라고 얘기했죠? 접착풀 같은 물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물은 아닙니다. 찹니다. 그것을 자아내는 반면에 한 계단이 있으면 거기엔 유리막 같은 것, 즉 말하자면은 유리막 같은 것이 돌면서 바로 그 물을 바깥으로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끼고 도는 망사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물을 망사로 내보내는데 그 망사는 쇠입니다. 쇠망입니다, 금속 쇠망. 내보냄으로써 거기에서 그 물로 증기를 일으켜서 바깥으로 화력을 내보내는 역할을 맡아서 합니다, 한 켜는.
여섯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 없는 여섯 계단이 있어서 내보내는데 하나는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바깥으로 내보내는 바깥 껍데기가 세 껍데기가 있는가 하면 안 껍데기가 여섯 껍데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주 알른알른한 막 또는 망 같은 문제. 자아내는 그 자체는 세 계단이 되기까지는 찹니다. 그러나 네 계단 째 돼서는 뜨거운 것을 자극해서 바깥으로 화기가 일어납니다. 일어나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작업을 안쪽에서는 하고 하의 바깥 껍데기에서는 바깥으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여기에서는 불길이, 즉 말하자면 뜨거운 김이 나가는 걸 바깥 계단 쪽에서는 잡아당기면서 가운데서는 조절을 합니다. 바깥으로 내보내는 조절을 하면은 바깥 껍데기에서는 그걸 정돈합니다. 이렇게 해서 화력이 바깥으로, 이것이 만약에 이렇게 정돈이 되지 않았다면 터지고 맙니다.
우리 인간도 이렇게 정돈이 되지 않았다면, 정수에, 즉 말하자면 체내의 모든 것이 중심으로 들지 않는다면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태양도 인간의 역할처럼 꼭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뇌로 인해서 모든 작업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깐 무전통신기가 항상 조달을 하고 있습니다. 자동 발전기가 항상 돌고 있고요. 그럼으로써 우리 혹성이 만약에 사흘을 돈다면 그건 일 초를 돌고 있습니다. 움죽거리는 것이 말입니다.
내가 “태양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다.” 하는 것은, 만약에 여러분의 체가, 예를 들어서 태양의 그 뜨거운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타 죽고 없어지죠? 물질이라는 건 그렇게 없어지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불 속에서도 물속에서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불 속에 들어가서 모습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문제도 바로 그 뜻입니다. 태양계의 모든 생명이 아니, 체 없는 생명이 모습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게 뜨겁겠습니까? 그것은 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타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따뜻한 태양 빛을 내리쬐어서 만물을, 곡식을 익혀 여러분 입에 들어가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온화하고 따뜻하다면 만 백성을 다 한 팔로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생각을 잘 낸다면 그렇게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한 것을, 그 마음을 가지고도 우리는 좁은 마음으로 뛰어넘지 못하고 참….
우리는 인간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까? 이 지구에서도 지금 인간이 되려고 무척 애쓰는 게 있습니다. 모습을 차츰차츰 바꿔가면서 가다가 보니까 인간을 봐야만 자기가 그 모습을 타고나겠기에 인간을 납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납치해서 그 모형대로 그걸 봤으면 바로 자기 몸을 그대로 진화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능력은 있으나 바로 봐야, 먹어봐야 또는 들어봐야 모든 것을 알겠기에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서로 경쟁으로써 발전을 이룬 겁니다. 우린 인간 되는 것도 경쟁을 해서 인간이 됐고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경쟁을 하면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도량이라는 자체, 우주 전체의 한 도량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치열한 경쟁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쪽에서는 저쪽 정보를 수집하려고 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것을 수집하려고 하는 문제들이 지금도 허다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국내에서도 그렇지마는 세계적인 문제에서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를 먹으려 하고 저 나라에서 이 나라를 뺏으려 하는 그런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금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내의 우리 사정은 더 치열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마음 한생각이 그렇게 넓고 묘하고 또 생동력 있게 나갈 수 있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대인이라면 우리는 앉아서 호국불교를 할 수 있고 앉아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고 앉아서 우주에 상응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몸이 나서서 호국불교를 하고 우주에 상응하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몸 하나가 지금 미국을 가려도 그렇고 소련을 가려도 그렇고 막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를 그렇게 몸뚱이가 다니면서 펴는 시기는 벌써 지났습니다. 한생각으로써 우주를 둘러쌀 수 있는 그러한 마음, 한마음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인간 하나 하나에게 더불어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광대무변한 이 법을 상실하고 배척하고 자기 자신의 그 광대한 능력을 아주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멸시 안 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이끌어온 그 은혜를 잊고 있는 거고 또 자기 능력을 아주 포기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주 대천세계로부터 우리 모두가 이렇게 등장이 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에 미생물로부터 큰 짐승으로 이렇게, 물에서도 나고 화(化)해서도 나고 그 후에는 알로 낳게 됐고 태로 낳게 됐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거죠.
비유를 해서 지금 지구에서도 세계적으로 볼 때에 ‘인공위성을 띄운다, 우주정거장을 세운다’ 이러는 문제도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지 않고 무허가로서 우주에 상응도 하지 않고 회의도 안 하고 서류도 올리지 않고 우주정거장을 세운다면 우주정거장은 파괴될 수 있는 우려가 십중팔구입니다.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의 그 섭리에 서로 상응을 할 줄 모른다면, 바로 회의를 하지 않고 무시하고 들어가는 게 되기 때문에…, 그 뜻을 모르거든요. 우리의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 바깥으로 권위를 쥐고 있는,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또 알 수 없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는 것은,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나가는 겁니다. 타버리고 나가고 부서집니다.
물질적으로 예를 들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지금. 그러나 물질적인 이 문제로 인해서 우리가 부처를 이룰 수도 있고 지혜를 넓힐 수도 있고 발전을 이룰 수도 있고 또는 첨단을 이룰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 이 자체도 무시해서는 아니 되죠. 모두가 이 육신을 받았기에 진화력을 가지고서 창조해 온 거 아닙니까? 거듭거듭 거쳐 가면서 물에서 나오면 추워서 털옷을 입고 또 털옷만 입어도 그건 살기가 부적당하고 괴로워. 그래서 점차적으로 돌아가다 보니까 자꾸자꾸 괴로운 거를 떨어버리고 자꾸 진화를 시킨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딴 데서는 여기까지도 올라오지 못한 이치의 모습들을 가진 사람들도 있거든요. 워낙 많은 생명들이 있어서요. 예를 들어서 한 일억년 전이라고 본다면 아마 우리 귀도 이만큼 길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또 연구를 거듭해서 지금의 이 모습으로 진화를 했겠죠.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온 것이 다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면 나 아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게 조상이요, 전자 후자가 다 여기에 있다 이겁니다. 과거다 미래다 할 것 없이, 우리가 전자에서부터 쭈욱 계산해 본다면 미생물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올라오면서 진화돼 왔으나 그 살던 습에 의해서, 그 착에 의해서 습이 조랑조랑 조랑조랑 달려서 지금 여기 와서 돌돌 말리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꿈에나 생시에나 그 붙는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인연줄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끊을 수도 없고 칼로 벨 수도 없어요. 무의 칼이 아니라면 끊어질 수도 없는 겁니다. 무의 줄이기 때문에, 무의 인연줄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던 습의 줄이기 때문에, 그것이 조랑조랑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데 지금 여기에 다 같이 붙어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서, 과거에 있는 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생각나는 대로 일심에서 나가는 거 일심으로 든다. 일심으로 들면 일심에서 모든 일체 만법이 나가고 든다. 그러니 네 주인공을 발견해라! 네 주인공을 발견할 때는 부처님을 봐도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이고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니 절대로 둘로 봐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고 자고 깨고 먹고 하는 것이 전체 참선이지 참선이 따로 있어서 결제 해제가 있고, 참선이 따로 있어서 앉아서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명상은 명상이라는 이름이 있고, 좌선은 좌선이라는 이름이 있고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떠나서 진실한, 인간이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 자체가 바로 참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중심으로서 만법이 나오고 만법이 드니 주인공에 모든 거를 좋은 일이나 즐거운 일은 감사하게 놓고, 안되는 게 있으면 안되는 대로 ‘당신이 하는 거니까’ 하고 놓고, 모든 것을 그렇게 놓다 보면 대의정이, 미지수의 그 어마어마한 의정이 스스로 나오는 것이지 남이 화두를 줘서 의정을 내는 거는 절대 아닙니다! 남이 줘서 언제 이루겠습니까? 남이 주는 화두를 가지고, 남이 강제적으로 하라는 걸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저 불덩어리 저쪽을 뛰겠습니까? 저쪽이 바로 여깁니다. 요기 앉은 방석에서 한 번 돌아앉기가 그렇게 어렵단 얘깁니다.
한 번 이렇게 움죽거리는 것이 바로 우주를 넘나드는 일입니다. 이거 한 번 이렇게 움죽거리는데 과거생이요, 한 번 움죽거리는데 미래생이라 이거야. 현재에 내가 앉았는 데 과거생도 미래생도 있는 것이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야. 여기에는 절대로 어떠한 것이 붙을 자리가 아니다 이겁니다. 삼천대천세계의 생명들, 물의 생명, 불의 생명, 돌의 생명, 모래 생명 전체가 하나의 공(空)에 들었으니 그 공에 들은 한 점의 마음이 우주에 상응하고, 모든 것을 같이 돌고 있으니, 비유해서 물감이 열여덟 개라면 ‘어느 물감이 진짜냐?’ 하고 물을 때 어떤 것이 진짜라고 말 못 하듯이, ‘내가 이 우주의 근본, 대인(大人) 부처요.’ 하고 나설 수 없는 것이 바로 부처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조그맣게 독 안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독 바깥으로 훌쩍 넘어나가서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나름대로. 지구가 독이라면 나라를 세워서 독 안으로 만들어 놓고 또 있고, 또 나라를 세워놨으면 자기 집을 독 안을 만들어 놓고, 자기 몸을 독 안으로 만들어 놓고, 몇 겹으로 독 안을 만들어 놓고 거푸거푸 거쳐 창살 없는 창살을 만들어 놓습니다. 생각을 해서 한 번도 뛰어넘어보지 못하는 이러한 관계상 우리는 해탈을 못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디 문이 있습니까? 문이 없어서, 하나도 문이 없어서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너무 문이 많아서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생각 한생각에 달린 거지. 여러분, 여기 앉아서도 한번 훌쩍 뛰어넘어서 저 허공으로 무중력 상태로 나가보십시오. 그 마음, 한 점의 마음으로써 우주세계를 한꺼번에 듭니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바로 한 점의 마음입니다. 이거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능력의 강한 생동력입니다.
우리의 섭리가 우주의 섭리와 더불어 같이 돌아간다는 이 사실을 아셔야 할 겁니다. 태양계나 다른 혹성들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중천세계라고 봅니다. 여기를 우주로 말하자면 중간 우주다 이 소립니다. 상 우주가 있고 중간 우주가 있고 소 우주가 있어. “대천세계”라는 것이 그런 데서 말이 나온 거라. 대천이 있으면 중천이 있고 소천세계가 있어, 우주세계. 우주세계에는 헤아릴 수가 없이 은하계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은하계 본부가 세 개라면 이 세 개의 은하계가 있기 때문에 은하계와 혹성들이 거기에 연관성이 있어서 돌아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 광대무변한 섭리를 어떻게 파악을 하시렵니까. 나는 말로다 파악을 못하겠습니다. 말로 여러분한테 알려드릴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떠한 부문에 대해 질문을 하신다면 그건 똑바로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청해서 얘기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거는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핼리혜성만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한다는 걸 한마디로 꼬집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세 가지의 소임을 맡아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어떤 거 하는 사람입니까?’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까요.
이 모두가 광대무변하게 벌어진 이 세계, 때에 따라서는 말로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는데 조그마한 어떠한 물체가 자꾸 커지다가 보니까, 이 지구에서도 사람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봅니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왔는지 그것조차도 모르는 현상이, 예전에 몇천 년 전만 하더라도 많이 있었다고 봅니다.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도 없어지는 수가 있고 물에 나갔다가도 없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덤불 안에 들어가서도 없어지는 수가 있고, 그것은 말을 들어서가 아닙니다. 지금도 커지면 커질수록 드문드문하지마는 그것이 있지, 없는 건 아닙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에 인간이,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얼마든지 모여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 인간 되기 이전, 밑으로 연쇄적으로 내려 가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전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절에 아주 열심히 다녔답니다. 이거는 들은 얘깁니다만, 그 얘길 듣는 순간에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냥 보통 있는 얘기야.’ 이랬습니다. 그랬는데 그 어머니가 자식을 못 잊어서 말입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마는 이렇게 그냥 얘기하죠. 자식은 그 어머니가 개로 태어난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디를 가다가 보니까, 강아지가 따라 들어와서 영 나가지를 않아요. 내쫓으면 또 들어오고 내쫓으면 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꿈을 꾸니까 어머니가 강아지더랍니다. 강아지가 말을 하기를 “내가 니 에미다.” 하더랍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또 변해서 자기 어머니로 보이면서 강아지가 됐다 어머니가 됐다 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강아지를 내쫓지 않고 어머니로 모시고서 발도 씻겨주고 옷도 해 입히면서 목욕도 날마다 시키면서 절로 모시고 다니며 대장경도 좀 보게 해드리고 각 절마다 구경을 시켜 드렸답니다.
자식은 효자로서 세상에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있건만, 어머니는 사람으로 살던 마음만 있고 개의 허물을 썼으니 사람과 개의 허물 쓴 거는 정반대로 갈라져 있다 이겁니다. 세계가 다른 거야, 개세계하고 사람세계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에서도 여러분이 살다가 죽어서 그렇게 옮겨가도 모습을 달리 했기 때문에 모를 겁니다. 형제가 그렇게 됐는지 부모가 그렇게 됐는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거죠. 만약에 그것을 여러분이 알게 됐다면 원수는 도끼 가지고 죽이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아는 자신의 자성불은 모든 전체, 대의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보면은 하나도 남이 없고 하나도 죽일 게 없고 하나도 살릴 게 없고 모든 게 그대로 자연입니다. 전부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정말 간절합니다. 이 뜨거운 피가, 여러분의 피나 뜨거운 이 마음의 피나, 솟구치는 이 피가 바로 여러분의 피며 내 피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간절한 이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때는 이렇게 한탄도 했습니다. 예전 얘깁니다. ‘임이여! 무지렁이 같은 나를 이렇게 가르쳐서 모두가 둘이 아닌 것을 알게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리렵니까? 어떻게 해야만 됩니까?’ 하고 한탄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남 못 듣는 데서 노래도 했고, 노래가 시도 됐고 시가 노래도 됐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방방곡곡에 아니 다니는 데 없이 다니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가 왜,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이렇게 갈까? 아하! 이것은 어딘가가 물이 돌고 돌고 돌듯이 쳇바퀴 돌듯 하는 것이 우리의 이 마음 아닌가?
우주 만물 만생이, 유생 무생이 다 같이 이렇게 돌고 있거늘 어찌 환상으로 보이는 귀신을 보면 마다하고 달아나갈까. 그리고 무섭다고 하나. 그렇게 달아나갔기 때문에 해치지 않나. 동심으로서 따뜻한 마음을 갖는다면 모두 우리 부모형제가 죽은 영들인데, 내 몸 내 마음 내 모습이었는데, 어떠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자 바로 나의 모습이었는데, 덥석 껴안고 위로해 주는 마음을 갖는다면 바로 내 마음을 내가 위로하는 거라. 모두가 둘이 아닐지언대 광대무변한 법, 그 법칙에 의해서 자연으로서 돌아가는 향기로운 그 꽃내음을 온 누리에 안 풍길 수 있나요?
그래서 지금은 몸으로 다니면서 하고 말로 하기보다는 한생각으로서 우리 국내를 지키며 또는 세계를 조정하면서 우주에 상응하면서, 여러분의 모든 것이 좀 더 정신적으로나 마음적으로 항상 넓게 지혜롭게 생동력 있게 살게끔 언제나 내가 돼주는 그런 마음, 마음새를 가지고 항상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간다면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픔이 어찌 남의 아픔이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왜 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갔을까요? 뜻이 그렇게 묘한데도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무생의 이치를 모르고 유생의 껍데기만 보고선 좌우하는 거야, 결정을 짓고. ‘저 사람은 왜 저래. 에이그!’ 말만 듣고 또 그 사람이 돼보지도 않고 결정을 짓는 거죠. 그러니까 화를 일으킨단 말입니다. 싸워야 하고 증오해야 하고 미워해야 하고 이런 문제가 나오는 게 조그마한 일이지만 이 일로 대국적인 일도 벌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끼리도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니 요만한 불씨가 전체 큰 불씨가 될 수도 있고 큰 불씨가 다 태워버릴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예전에 부처님께서 가르친 거는 화두법이다 좌선법이다 또는 묵조선이다 간화선이다 이런 게 아닙니다. 그런 문제들도 모두 근래에 난 거지 전자에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첫 번에 우리가 들어올 때는 문이 좁아도 나가면 문이 넓고 벌판이 돼야지, 길 없는 길이 돼야 하고 발 없는 발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이 뛰어넘으려면 불도 있고 가시도 있고 물도 있고 산도 있습니다. 그런 데를 뛰어넘는데 어찌 있는 발로만 뛰어넘으려 하십니까? 그리고 길이 있는 데로만 가서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하십니까? 길 없는 길이 있고 발 없는 발이 있고 손 없는 손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는 한 점의 마음에서 그 양면을 다 쥐고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 오장육부에 정맥 동맥을 다 가지고 있듯이.
그럼 오늘 이것으로써 끝마칠까요.
※위 법문은 1986년 3월 16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