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에는 상업이 발달해 번창한 도시는 인구가 백만이 넘을 정도였다. 북송의 변경( 京, 지금의 개봉開封)은 삼경(三更)이 지나도록 야시장이 열려 거리마다 많은 상인과 짐꾼들, 수공업자와 관원, 문인들이 북적거렸다.
상인들이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밤을 새우고, 음주와 오락, 휴식을 위한 장소가 필요했다. 이때 다양한 형태의 다방(茶房), 다사(茶肆), 다옥(茶屋)이 생겨났다. 다방, 다사, 다옥 등은 지금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관(茶館)의 옛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방은 단지 차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몇 시간이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상거래를 하는 장소였다. 규모가 큰 다방에서 작은 곳에 이르기까지 상인들과 노인, 젊은이, 부녀자들의 오락장소가 되어 성시를 이루었다.
경치 좋은 곳에 다리를 만들어 이곳을 거닐며 달빛과 함께 차를 마시며 선인(仙人)의 경지를 모방한 곳도 있었다. 유교의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자연관을 추구하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상류 문화로 인식되었던 차가 민간의 문화로 확산되는 과정의 한 면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대중문화 속에서 교역과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매체로써 음다의 새로운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에 대한 다양한 욕구들은 민간 요(窯)에까지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형태의 다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남송의 임안(臨安, 지금의 항주)에는 크고 작은 업종의 점포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술집과 다방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사대부들의 모임인 계사(契社)에서는 서화(書畵)를 걸어놓고 감상했으며, 생화(生花)를 꽂아 놓는 등 장식에 매우 세심하게 신경을 쓴 곳도 있었다.
특히 기생들은 전문 찻집을 겸(兼)하여 영업을 하면서 차와 민간 문화 활동을 연결하기도 했다. 다병(茶甁)을 들고 다니며 차를 파는 행상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문인들을 위해 차를 끓여 주었던 사람들과 다방의 차심부름꾼으로, 차를 끓여 팔기도 했지만 흉사나 길사가 있으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들은 동네를 왕래하면서 중매쟁이 역할과 때로는 물건을 배달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일을 돕기도 했다.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오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차를 선물하고, 이사를 온 사람은 옆집 사람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는 등 차는 이웃과 친목을 위한 주요 물품이었다. 소수민족들에게 차는 귀중한 필수품으로써 남녀가 정혼을 하게 되면 신랑이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신부의 가족들에게 차를 올려 예를 표했으며, 이러한 절차를 ‘하차례(下茶禮)’라 한다.
한편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북방 민족들은 항상 야채가 부족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소화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비타민과 아미노산등을 공급하여 여러 질병을 예방,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원 사람보다 더욱 차가 필요하였으며 그들에게 차는 생필품이었다.
송나라는 소수 민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차를 이용했으며, 더욱더 차가 귀하게 된 북방 민족은 이것을 빌미로 국경을 넘어 와, 이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북방의 소수민족과 늘 싸워야 하는 중원은 ‘다마무역(茶馬貿易)’을 통해 군비(軍備)를 확충하고, 전매제도를 실시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했다.
이처럼 송대에는 대중적인 차 문화를 이룩함과 동시에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차를 적극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