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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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2부 70강 일념지경(一念持經), 아인돈진(我人頓盡)/한국학중앙연구원
32상을 애착 갈구만 할 것인가

32상을 애착 갈구만 할 것인가정말 혜능은 독창적이다. 그의 32상 해석은 그동안의 우리 해석과 다른 길을 간다.
여래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얼굴로 우리 곁에서 늘 있으니, 다시 오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경전은 이 역설 하나를 고구정녕 알리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데 혜능은 이 통상적 해석에 담긴 진부함과 태만을 뒤통수에 불이 번쩍나게 두들긴다.

(혜능 13-4)
“三十二相者, 是三十二淸淨行. 於五根中, 脩六波羅蜜, 於意根中, 脩無相無爲, 是名三十二淸淨行. 常脩此三十二淸淨行卽得成佛. 若不脩三十二淸淨行, 終不成佛. 但愛著如來三十二相, 自不脩三十二行, 終不見如來.”
“32상이란 32가지의 청정(淸淨)한 행동을 말한다. 오근(五根)의 다섯 감각기관으로 육바라밀, 여섯 가지 피안으로의 수행을 해 나가고, 의근(意根), 즉 의식의 수준에서는 무상무위(脩無相無爲)를 닦아 나간다. 이를 32청정행이라고 한다. 늘 이 32청정행을 닦아야만 즉, 성불을 성취할 수 있다. 32청정행을 닦지 않으면 종내 성불을 이룰 수 없다. 여래의 32상을 애착 갈구하되, 스스로 32상을 닦지 않으면 종내 여래를 볼 수 없다.”

(부연 13-4)
그는 하나도 실천, 둘도 실천을 다그친다. 내가 앞에서 적은 역설은 그저 한가한 희론(戱論)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재치는 있으나, 깊이는 없는 구두선이 되고 말 우려가 다분한 것이다. 혜능은 이 사태를 180도 돌려세워 놓는다. 그는 이렇게 깨우치려는 듯하다. “32상이란 32개의 청정한 행동이다. 여래의 표징같은 한가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네가 목숨걸고, 불교인으로서, 법답게 닦아야 할 평생의 사업이다. <금강경>이 ‘32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32의 청정행, 브라마차리야를 찬양은 하되, 열망만 할 뿐,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성취시키려 하지 않는 태만과 퇴전(退轉)을 경고한 것이다.”
그렇다. 책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가. 이불 속의 활갯짓으로 하자면 천하를 한 손바닥에 요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일에 나서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한발 나서는데 온갖 장애와 복병들이 발목을 잡고, 길을 가로막는다. 사업을 하는 자는 위대하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자칫 무책임하게 떠들기 쉽다. 실무에 관련된 일일 경우, 남의 제안과 시도에 쉽게 한 둘 결점과 미비를 찾아 헤집어대는 못된 버릇을 삼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면서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중용>은 “말은 내 행동을 돌아보고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자신이라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를 돌아본 다음, 입을 떼는 조심스러움이 인품과 능력의 가치를 가르는 큰 갈림길이다. 무아란 실천적으로 보자면, 비판으로 자동 모드 변환하는 자신의 오랜 에고의 관성을 홀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싸그리 불평을 쏟아놓기보다 보완의 방책을 어드바이스하고, 더 나은 대안을 설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32의 청정행을 입으로 떠들기는 쉽다. 가령 성공한 사람을 선망하기는 쉽고, 또 아낌없이 존경을 표하기도 쉽다. 그러나 스스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어렵고, 마찬가지로 32청정행을 목숨을 걸고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사람은 더욱 귀하다. 혜능은 중생들의 오랜 습성인 게으름과 태만을 되돌려 반야바라밀의 사다리를 걸어 올라가도록 독려하고 있는 중이다. 혜능의 설법은 요약하면 이렇다. “너는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자각을 실천하라. 모른다고? 붓다의 말씀, 그 핵심은 심플하니, 다만 그에 따라 살도록 노력하라. 여기에 무슨 복잡한 체계며 이론이 필요한가.”
혜능은 그 요점을 잘 모를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하나는 ‘5근 중에 6바라밀을 닦으라’이고, 하나는 ‘의근 중에 무상무위를 닦으라’이다. 6바라밀은 감각을 길들이는 훈련이고, 무념무위의 수련은 상념-의지를 길들이는 훈련인데, 이 둘은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협력 동시해야 한다.
6바라밀은 익히 들어보셨을 터인데 <대승기신론>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분(分)’의 설법을 들려주기로 한다. 처음 바라밀이 아시다시피 ‘보시’이다. 줄 줄 모르면 이 문에 들어설 수 없다. 자기것만 챙기는 인색한 성격으로 불법을 구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러시아로 가자면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는 것과 같다. <기신론>에는 세 가지 보시가 적혀 있다. “만일, 누구든지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가진 재물을 여건에 따라 베풀지니, 그로써 자기 속의 인색함과 탐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기쁨에 같이 기뻐한다. 재난과 핍박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감당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들을 무외(無畏),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준다. 만일 붓다의 위대한 진리를 구하는 자 있으면,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가르침의 방편을 베풀라. 이때 명예와 이익, 존경따위를 바라고 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오직,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회향보리(廻向菩提)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것 하나 념념(念念) 늘 마음에 새기며 사는 것 하나 쉽지 않고,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수행인데, 그 청정행을 닦는 마음가짐이 바로 무상무위(無相無爲)이다. 무상이란 거듭 말하지만, 나의 욕망과 에고의 이해관계를 통해 사물을 가르고 편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나의 욕망과 이해관계에 입각해 사태를 편의적으로 이기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당연, 쉽지 않다. 그러나 훈련해 나갈 수 있고, 그만큼 그는 자유와 평정을 얻는다. 작은 포기는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 진짜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무상무위를 적극적으로 수련하려 할 것이다. 1차적 즉물적 계산이 계산의 전부라고 생각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혜능 13-5)
“世間重者, 莫過於身命. 菩薩爲法, 於無量劫中捨施身命, 分與一切衆生, 其福雖多, 亦不如受持此經四句之福. 多劫捨身, 不了空義, 妄心不除, 元是衆生. 一念持經, 我人頓盡, 妄想旣除, 言下成佛, 故知多劫捨身不如持經四句之福.”
“세간에서 중시하는 것은 목숨만한 것이 없다. 보살이 법을 위해 무량한 겁의 세월동안 목숨을 내놓고 일체중생에게 나누어 주는데서 얻는 그 복덕은 아주 많다. 그러나 이도 이 경전의 사구게를 수지하는 복덕만 못하다. 여러 겁에 걸쳐 목숨을 내놓더라도 공(空)의 뜻을 모르고 망심을 제거치 않으면 여전 중생인 것이다. 일념으로 경전을 지니고 아(我)와 인(人)의 상이 돈진(頓盡), 몽땅 사그라지면, 언하에 성불하리니, 그래서 알겠다. 여러 겁에 몸을 내놓는 것이 경전 사구를 지님만 못하다는 것을….”

(부연 13-5)
보시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 가치는 아니다.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덕성으로도 남의 재난에 팔 걷어부치고 나서는 용기로도 아직 잔은 채워지지 않았다. 최종관문은 ‘자기 존재의 최종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는 나도 없고, 보시를 받는 너도 없다. 구하는 것도 내 손이 아니고, 구함받는 사람도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안팎이 비어있는 마음, 즉 공(空)의 ‘태도’ 혹은 ‘자세’로서 반야바라밀은 완성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혜능이 문득 들었던 그 처음의 소리가 불교, <금강경>의 최종적 설법이었다.
2006-12-04 오전 10: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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