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들르니 같은 세대의 소설가가 써놓은 <어머니의 수저> 라는 음식이야기 책에 손이 갔다. 가지고 와서 시간 나는대로 몇 페이지씩 읽어내렸다. 거기에 참으로 인상적인 표현이 나온다. 평생 바람만 피운 어느 플레이보이 노인네에게 임종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매 끼 정성다해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던 그 여자’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승속을 떠나서 참으로 큰일이다. 오죽하면 ‘생사일대사’는 ‘밥먹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외국에 나가 오랫동안 살던 스님이 대중처소에 와서 제일 좋은 일이 ‘내 손으로 밥 해먹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뭘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북소리 종소리에 맞추어서 큰방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하긴 남이 차려줄 때는 차려주는 일의 고마움을 모른다. 그 때는 그것도 내 복이려니 하고 그냥 ‘남을 위해서 먹어주는 것’처럼 여겼다. 그것도 하기 싫어 큰방공양에 빠지면 어른스님에게 ‘차려놓은 밥도 안 먹는다’는 지청구를 듣기 마련이다. 결론은 항상 승려노릇이란 ‘예불공양 잘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끝맺는다. 그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세월이 지나 귀밑털이 희끗희끗해지는 나이가 되어보니 정말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대중을 떠나 사는 스님들에게 한 끼 한 끼 해결은 바로 수행과 다름 아니다.
토굴에서 밥해 먹으며 혼자 살아보니 살림하는 마을여자들의 심정을 알겠더라고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준비 할 시간이고, 어영부영하다보면 저녁시간이고, 저녁 먹고 설거지 마치고 나면 잘 시간이라고 했다. 왜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이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귀찮아서 하루에 두 끼 그것도 나중에는 한 끼만 저절로 먹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 한 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진짜 열심히 정진하면 천신이 하늘에서 공양을 갖다준다고 하든데…. ’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선녀가 매 끼니는 아니더라도 하루 한 끼 정도라도 밥을 가져오는 상상은 스님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꾸어본 꿈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천공(天供)을 받았다는 선사들이 많다. 신라의 자장도 그렇고 중국의 도선도 그랬다. 그런데 중생심은 그 천공받는 일을 자랑하고 싶기 마련이다. 꼿꼿한 교과서적인 두 스님은 동시대의 경쟁자이면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원효나 규기가 내심 못마땅했다. 그들이 찾아 왔을 때 ‘천공받는 것’을 보여주면서 ‘승려노릇 좀 잘해라’라고 훈계하려고 했는데 웬걸 그날은 천공이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도선은 현장법사의 수제자인 규기를 존경하면서도 한편 그의 수행관을 의심하였고, 규기 역시 도선의 앞뒤가 꽉 막힌 그 소견머리를 얕잡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천공을 받는다는 사실은 내심 부럽게 여겨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어느 날 도선의 처소를 방문하여 천공을 함께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진종일 그와 있어도 천공이 오지 않았다. 규기가 떠나고서야 비로소 천공이 왔다. 도선은 “어찌하여 때맞추어 가져오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천신을 꾸짖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늘 규기 스님과 이야기 할 때 백호광명이 온 누리에 가득하여 들어올 길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도선은 규기를 마음으로 존경했다. 자장 역시 천공이 오지 않자 원효가 돌아간 뒤늦게 온 천신의 ‘호법신장이 지키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한 변명을 들은 이후 원효에 대한 그의 태도가 달라진 것 역시 그 내용구성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천공으로 인하여 서로의 공부경지를 확인하게 되었으니 밥은 단순한 밥만은 아니였다.
그나저나 이 일요일 아침을 거르고 있는 나에게 어느 선녀가 천공을 갖다줄 지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