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는 생식 목적을 위해서만 성욕이 일어나고 성관계를 맺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적 욕구가 터져 나오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미 원시 구석기 시대의 암각화에서도 이 문제를 과장해서 표현해왔고,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 이 성 문제 때문에 숱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역사상 수많은 성인·철학자들이 “성적 욕구를 억제ㆍ자제하라”고 가르쳐온 것도 어찌 보면 그것의 자제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지 모른다.
서양 문학사에서 ‘불후의 고전’이라는 평을 듣는 <데카메론>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에서도 신부ㆍ수도사나 수녀의 문란한 성 문제가 거론되었고 야담집에서는 단골 메뉴가 되다시피 하였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나 중국의 옛날 스님들의 일화를 전하는 어록이나 행장 등에도 이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전해지는 것을 보면,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행자의 길에 나선 스님들이나 독신을 선언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 해결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요즈음에도 이 문제는 소설과 영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나 <만다라>에서도, 아무리 애를 써도 끊어지지 않는 성욕 때문에 고뇌하는 스님이 등장해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숙제’를 안겨주었다.
이런 사정은 상좌부 불교권에 속하는 동남아 불교국가에서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11월 22일 <로이터통신>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참선 중에도 성욕이 일어나서 고통을 겪던 35세의 태국스님이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나는 세속의 온갖 욕망을 모두 포기했다”면서 의사의 봉합수술 제의도 거절하였다.
어찌 보면 웃음거리로 들리는 이 짧은 뉴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가 수행자에게 있어 성 문제는,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위적으로만 말할 수도 없는 복잡 미묘한 배경이 있다.
“참선에 방해가 된다”며 성기를 잘라내고 봉합 수술을 거부한 이 스님의 결정이 옳은 것일까? 명상이나 참선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지경에 이를 정도라면, 그 스님이 설사 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간다고 하면서도 실제 마음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혹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육체적 결함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면 의사의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가끔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스님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적 행위가 과연 부처님 법에 맞을까? 부처님 제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가? 인간의 기초적인 문제를 풀어줄 수 없다면, 명상이나 참선 지도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파 줄’의 법문에 비추어보면, 이런 스님들의 행위는 ‘비파 연주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해서 줄을 꽉 죄어 결국 끊어버리고 마는 극단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이 극단적 행위자를 칭찬하고 존경하는 풍조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좋은 곡을 연주하기에 딱 맞게 ‘비파 줄’을 조절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비파 연주자가 될 수 없고, 이런 제자를 가르쳐온 스승도 존경받을 자격이 없다. 마찬가지로, “욕구를 끊어버리겠다”며 극단적 행위를 하는 스님들은 훌륭한 수행자가 아니며 이렇게밖에 가르치지 못했던 지도자들도 훌륭한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참선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성기를 잘라낸 태국스님 이야기를 전한 <로이터 통신>의 짧은 기사가 우리 불교계에 던지는 ‘물음’이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