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는 화엄사상의 정수를 가장 잘 표현한 신라 의상대사가 지은 시(詩)다. ‘법성원융 무이상’으로 시작해서 ‘구래부동명위불’로 끝나는 아름다운 게송이다. ‘우주 존재의 원래 성질이 둥글고 화합해 있고 두 가지 극단에 있지 않다는 것, 이러한 진리가 오래 전부터 움직이지 않고 존재하며, 이를 부처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인도에서 존재하던 가타라고 불리던 게송이 이렇게 한자로 변환돼 지금껏 전해왔다.
화엄사상의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 다른 것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고, 생과 멸 또한 상호 변환되는 상태일 뿐’이라는 내용은 현대물리학의 존재론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요즘 필자의 가슴을 울리는 문구는 법성게 중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隨然成)’이라는 문구다. ‘자성은 지키지 않으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라는 말이다.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지혜가 담긴 말이며, 놀라운 과학이 담겨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불자이든 아니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반야심경의 ‘불구부정’이다. 즉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상징인 연꽃은 더러운 속세에서 더럽혀지지 않는 깨끗한 부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진흙을 더럽다고 하는가. 반야심경에서는 불구부정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비슷한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깨달은 자들은 왜 몸이 아픈가. 아프다고 왜 병원에 가는가. 불생불멸이라고 하면서 왜 동료가 죽으면 슬퍼하고 장례를 치르는가.
아마 해답은 바로 ‘불수자성 수연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그리되는 것이다. 나의 생물학적인 진화 과정이 아픔을 느껴야 더 잘 지탱하도록(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외부의 공격에 대해 방어할 수 없으니까) 되어 있는 인연의 과학 때문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그렇게 두려워하도록 된 인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진흙을 더럽다고 느끼는 것 또한 진흙 환경에서는 미생물의 공격에서 의해서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진흙에서 생존하는 수많은 생명체에게는 진흙이 가장 깨끗하고 편안한 곳임에도 말이다.
이와 같이 깨끗하고 더러운 것, 죽고 사는 것에는 결코 원래 그러한 성질, 변하지 않는 성질이 없다. 단지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법칙 그리고 주어진 인연법칙(아니면 과학법칙)내에서 만들어진 인연의 나툼(manifestation) 뿐만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자성이 없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결론과도 일치한다.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의 상호 변환, 소립자의 탄생과 소멸은 어떠한 우주의 존재도 원래 변하지 않는 성질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죽음이 어찌 삶과 다르고, 그림자가 어찌 빛과 다르겠는가. 아니 두개가 같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설한 중도의 원리인지 모른다. 늦가을, 다시 필 봄을 위해서 준비하는 나무를 보면서, 법성게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