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907~960)는 당이 멸망하고 북방의 유목민들이 흥기하여 남북이 융합되고, 북방 사회가 중원(황하강 중류)과 맞서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때였다.
오대십국은 직접적으로 당의 풍속을 계승했기에, 비록 당이 멸망했지만 많은 문화활동은 이어져갔다. 차 문화도 이와 같이 민족교류와 사상이 충돌하는 이 시기에 발전해 당대를 잇고 송대의 차 문화를 열어주었다. 더욱 남방의 오(吳), 촉(蜀), 강서성, 절강성에는 자원이 풍부해 싸우는 일이 북방에 비하여 적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은 음다(飮茶) 단체인 ‘탕사(湯社)’를 조직해 매일 차 끓이는 일로 서로 겨루어 맛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벌을 주었다.
관리가 된 문사들은 ‘탕사’를 열어 차의 품질을 평가하여 음다 활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했다. ‘탕사’는 송대의 ‘투차(鬪茶)’로 이어지며 결국 이러한 것들은 현대 차 전문가들의 품평에도 영향을 주었다.
좋은 차가 많이 생산되는 건안(建安)은 공차(貢茶)지역으로 조정에서는 이곳에 공차사를 파견하여 단차(團茶) 만드는 과정을 감독했다. 이곳의 단차는 민간에서 마시는 차와 구별하기 위해 모양을 새롭게 하고 용봉(龍鳳) 도안을 만들어 새겨 ‘용봉단차’라고 했다. 찻잎을 따는 시기부터 차를 만드는 기술과 포장까지, 제일 좋은 찻잎으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 공납했다.
황실에 공납을 한 후부터 단차는 더욱 정교해지고 많은 종류의 우수한 품질의 차들이 만들어졌으며 차는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었다. 공차는 용봉단차뿐 아니라 십여 가지의 품목이 있었는데 한해에 수량은 30여만 근이 되었다. 가격은 한 편(片)에 수만 냥으로 차의 실제적 가치를 뛰어넘어 심리적 가치로 작용했고, 일반 백성들은 볼 수도 없었다. 용 단차는 황제ㆍ친왕ㆍ공주에게만 공급되고, 봉 단차는 학사ㆍ장군에게, 유(乳, 차품의 한 종류)는 가까운 신하와 사대부들에게 하사하고, 백유(白乳)는 관청의 손님들에게 공급되었다. 이처럼 용봉단차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귀한 차였다.
공차제도는 일반 백성에게는 부담을 주었지만 좋은 차를 공납하는 관리에게는 높은 직책을 주기도 했다. 그 한 예로 선화 2년 정가간이라는 관리는 그의 조카를 시켜 명차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주차(朱茶)를 구해오자 그는 아들에게 차를 주어 황제에게 바치게 했다. 이것으로 아들이 벼슬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주차를 발견한 조카가 멀리서 울분을 터트리자 사람들은 이 차를 ‘천리까지 원한이 가득하다’고하여 ‘천리매원(千里埋怨)’이라고 했다.
이러한 공차제도는 많은 폐단을 가져왔지만 궁중의 음다 풍속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송 태조부터 모든 황제들이 차를 좋아하여 황제와 관리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조정의 모든 의식에 차를 이용하였고, 종묘(宗廟)에 차를 올려 국가 규범으로 삼아 궁중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조정에서 큰 연회가 있을 때 황제 앞에는 항상 차상(茶床)을 차렸고 조의(朝儀) 중에는 다례를 했다.
사신을 접대할 때나 고별할 때는 연회에서 차와 술을 하사하는 것을 예의로 하였다. 왕들은 왕비를 맞이할 때 예물로 양ㆍ술ㆍ비단 외에 ‘차 백근’을 주었다. 후에 민간에서도 정혼할 때 다례를 하는 풍속이 생겼다.
황제가 순례를 할 때 그 지역의 노인들에게 비단옷과 차를 하사하고, 절을 지날 때도 승려와 도인들에게 비단과 차를, 국자감을 시찰할 때도 학생들에게 차를 하사했다. 황제의 음다는 자연히 지존의 지위를 상징한 만큼 사치로 흐르는 폐단도 많았지만 궁중의 차의(茶儀) 차연(茶宴)의 거행으로 인해 민간의 음다 풍속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