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꺼진 화로, 먼지덮인 사당
혜능의 해석이 ‘실천적’ 혹은 체험적 지평을 철저히 고수한다고 한 바 있다. 지금 13장의 “먼지는 먼지가 아니다. 그래서 먼지라고 한다.”를 두고 한 혜능의 해석은 이렇다. “이 말은 념념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함으로써 뿌옇게 어지럽던 상념과 천방지축하는 의지의 파편들이 차분해지고 투명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즉, ‘그래서 더 이상 먼지는 없다!’는 뜻이다.”
먼지는 먼지가 아니다
말은 즉 그러하나, 실지(實地) 여기까지 가기는 정말 어렵다. 밖을 향해 허덕대기를 멈추어야 하고, 밖으로부터 받는 자극에 초연해져야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평판이 곧 자원인 사회에서 자극에 초연하기는 정말 어렵다.
여기 외람되지만, 하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이 있다. 욕망도 먼지도 제거하려고 들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눌 스님도 <수심결>에서 “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들지 말라. 그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 없다”고 경계하셨다. 그럼 어떡할 것인가. 내 생각에 세 가지 길이 있다. 1) 욕망이나 먼지나 앞뒤 차단하고, 그 관성을 성찰하는 혜능식 ‘좌선’을 통해 먼지는 가라앉는다. 지관타좌(只管打坐), “다만 앉으라.” 2) 두 번째 길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경쟁적이지 않은 길을…. 사람을 피곤하지 않게, 세속적 가치와는 다른 이를테면 예술적 가치나, 보람을 주는 일을 찾아 거기 매진하는 것…. 남들이 하찮게 여겨도 좋다. 자기만의 가치, 자기만의 삶을 몰두할 때,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있을 때, 거기가 곧 열반이고, 자유다. 이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보시나 헌신, 봉사를 통해 얻는 기쁨도 들어있다. 3) 세 번째가 종교적 전향이다.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주는 행복은 세속의 물질이 한시적이고 타자적인데 비해, 그리고 그 ‘물질’들이 쉬 효용이 떨어지거나 자기파괴적이기 쉬운데 비해-쇼핑 중독같은 것, 마약이나 과도한 성(性)적 방종, 권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같은 것이 그렇다-이 영혼의 기쁨은 내면의 안정에서 외면과 타자로 펼쳐가는 잔잔한 명상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전체에 휴식을 제공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다. 그 힘이 동심원으로 물결치고, 교제하면 어느덧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 힘은 바이러스처럼 빠르고, 한꺼번에 세상 전체를 물들이고 바꾸어놓는다. 사람들이 이 가치를 잘 믿지 않는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가령 정현종의 시들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셋을 동시에 추구하면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 틀림없다. 문제는 다시 훈련이다.
그래서 먼지라 한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그럼 아무것도 아니하는 삶이 될 것인가. 상념도 없고, 의지도 없이…. 그렇지 않다. 조주는 최고의 경지로 “불꺼진 화로, 먼지덮인 사당”을 읊는 제자의 자부에 혀를 끌끌 찼다. “쯧,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는 스승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배반했다”라고 했다. 파자소암(婆子燒庵)의 충격적 화두를 기억할 것이다. 어느 노파가 딸과 함께 수도승 하나를 키웠다. 10년을 밥을 해 먹이고 봉양했는데, 그릇이 얼마나 커졌나 싶어 딸을 방으로 들이밀었다. 방을 나선 딸에게 물었다. “너를 안을 때 느낌이 어떻다고 하더냐.” “마른 고목을 껴안고 있는 것같다 합디다.” 노파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이런 땡중을 위해 10년을 내다바치고 허비하다니….” 질탕한 상상력은 삼가는 것이 좋다. 대답도 삼간다. 화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메시지 하나는 불교가 선이, 노리는 목표가 인간의 자연스런 정감이나, 정상적 감각활동, 의식적 판단을 통한 행동을 무조건 제거하는 쪽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것을 매우 위험한 함정이라고 느끼고 있다는 점 하나이다. “여인을 끌어안아서도 안되고, 밀쳐서도 안되는” 이 딜레마가 선이, 그리고 당신이 실천적으로 풀어내야할 화두이다.
각설, 그러므로 “먼지는 없애려 해서는 안된다.” 먼지가 해방으로, 그리하여 보탬으로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불교가 설정한 이념, 즉 자리이타의 정신이다. 그때 먼지는 ‘내게’ 자기의식적 에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무아(無我), 의도와 콤플렉스가 배제된 형태의 정결한 의욕이 활약하는 곳, 여기가 바로 “그래서 먼지라고 한다”는 자리이다.
먼지가 아닌 것과 먼지가 있는 곳의 두 단계 스텝을-실지로는 한 스텝인데- 눈여겨 보아주시기 바란다. 혜능의 해설을 다시 인용한다.
(혜능 13-3)
“如來說, 衆生性中妄念, 如三千大千世界中所有微塵, 一切衆生被妄念微塵, 起滅不停, 遮蔽佛性, 不得解脫. 若能念念眞正修般若波羅蜜, 無著無相行, 了妄念塵勞卽淸淨法性. 妄念旣無卽非微塵, 是名微塵. 了眞卽妄, 了妄卽眞. 眞妄俱泯, 無別有法. 故云, 是名微塵. 性中無塵勞卽是 佛世界. 心中有塵勞卽是衆生世界. 了諸妄念空寂, 故云非世界. 證得如來法身, 普現塵刹, 應用無方, 是名世界.”
“여래가 말씀하시길, 중생들의 몸(性) 안에 있는 망념들은 삼천대천세계 안에 들어찬 먼지들같다고 했다. 중생들은 예외없이 망념의 먼지들을 덮어쓰고 있는데, 그것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며 불성을 가로막고 해탈을 방해한다. 만일 념념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著) 무상(無相)의 행(行)을 닦아 나갈 수 있다면 먼지처럼 뿌옇던 망념들이 어느덧 청정한 법성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궁극적 의미에서) 망념이란 없기에, ‘먼지가 아니다. 그래서 먼지라 부른다’라고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진짜라고 붇든 것이 망녕된 것이고, 망녕된 것이 기실 진짜라는 것을 알아, 진짜와 망녕이 함께 스러져 다시 다른 구분(法)이 없다! 그래서 ‘이를 먼지라 이름한다’고 말했다. 내 몸(性)에 아무런 진로(塵勞)가 없는 것이 곧 부처의 세계이다. 마음 속에 진로가 있는 것이 곧 중생의 세계이다. 여러 망념이 공적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세계가 아니라 한다’고 했다. 여래법신을 증득하여 널리 수많은 세계에 자유롭게 나투길래, ‘이를 세계라고 한다’고 했다.”
먼지로 만든 세계
여기 ‘세계’는 먼지들의 집적물, 혹은 결과물이다. 내 의식의 수많은 뿌연 먼지들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이다. 이것은 자기의식의 상관물이기에 객관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선 삼계유식(三界唯識)이라 외친 것도 바로 이, 너무나 분명하지만 보통사람은 잘 자각하지 못하는 사태의 체험적 확신이었다. 고로, 먼지가 없으면 세계는 자신의 모래성, 신기루를 허문다. <금강경> 맨 마지막에 적은 “꿈같고, 그림자같고, 물거품같고, 이슬같고, 번쩍이는 순간같은…(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이 바로 이 소식을 재삼 확인해 주고 있다. <화엄경>도 따라 말한다. “마음이 생기면 종종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는 곳에, 종종의 법이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사라지면, 마음으로 하여 출몰하는 법의 총체적 상(相)인 세계가 사라진다.
여기 유의할 것이 있다. 상(相)이 사라진다는 것은 심리적 구성물의 해체일 뿐,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물과 공기, 햇빛과 바람, 그리고 나와 더불어 있는 가족과 친구, 이웃과 공동체까지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實際)한다. 그 속에서 내 먼지와 내 세계로 하여 족쇄되었던 것들이 우르르 감옥문을 열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 혜능은 <금강경>이 지금 말하는 “그래서 세계라 한다”는 뜻의 깊디깊은 의미라고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