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은 지구상의 생물 중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또 ‘비록 물 한 방울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안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위대하다’고 했다.
죽음만큼 인간에게 영향을 준 사건이 또 있을까. 역사와 철학, 종교가 인간이 죽음을 인식한다는 데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은 박물관의 초기 인류의 발자취가 주로 제사와 무덤에서 발견되는 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20세기 과학은 인간이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고 정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50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아이를 출산할 때 여성은 신발을 거꾸로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또 과거 100년 전만 해도 전염병이 돌면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뿐인가. 나이가 들어 심장 등 장기가 쇠하면 그냥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전자의 일들을 죽음의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다. 출산은 삶을 위한 축복이고, 전염병은 더 이상 발을 못 붙이게 됐다.
또 심장의 동맥에 관을 넣어서 피가 잘 돌게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MRI와 같은 방식으로 뇌를 포함하는 몸의 곳곳을 마이크론 수준까지 관찰함으로써 조기에 사망요인을 차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과학자들은 암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하는 방법과 심지어 늙고 죽음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분자구조와 생화학 반응을 이해함으로써 늙고 죽음을 정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무모해 보이는 이 시도의 성공 확률은 높다. 분자수준의 분석 그리고 생명신호 체계를 이해함으로써 자연이 만들어준 법칙을 단시간에 깰 수 있을 것이다.
UN은 2030년이 되면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세 이상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수명 변화는 단순히 고령화 사회에서 예측되는 삶의 방식 변화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고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유학자 공자만큼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깊이 생각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히랍인들과 같이 논리적으로 존재와 진리에 대해서 파헤친 사람들도 없다. 절대자의 의미에 대해 유대인과 같이 깊이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와 이것이 주는 우주와의 관계를 부처님처럼 과학적으로 파헤친 분은 없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불자들은 다시 한번 죽음의 의미와 이것이 주는 삶의 영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할 시점인 것 같다.